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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공부 20교시(종교개혁시대)
박준원 2020-08-18 추천 0 댓글 1 조회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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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공부 20교시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127페이지입니다.

 

종교개혁의 다양한 세력들 중에서 독일 루터교회, 스위스 개혁교회, 재세례파를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영국 성공회, 가톨릭 종교개혁, 제2차 종교개혁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4. 영국의 종교개혁: 성공회

영국의 종교개혁의 주도세력은 1509년 왕위에 오른 헨리8세(1491-1547)였습니다. 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교황은 이 결혼을 무효로 하기를 거부했으며, 재혼할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헨리는 영국에서 교황의 권위 대신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정책으로 서서히 바꾸어 갔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설립이 이러한 계획의 하나였습니다. 헨리는 교리나 신학의 관심보다는 종교와 정치를 둘러싼 실제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토머스 크랜머(1489-1556)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함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이 영국 교회에 흘러들게 되었습니다. 

1547년 헨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에드워드6세(1537-1553)가 9살에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실제 권력은 고문들이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 개신교를 옹호한 세력이었습니다. 대주교의 직책을 계속 맡았던 크랜머는 프로테스탄트 형식이 강조된 공식 예배를 도입하였고 마틴 부처등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들을 영국에 정착시켜 신학적으로 지원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6세가 16세 되던 1553년에 사망하여 영국은 종교적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메리 튜터(1516-1558)가 왕이 되었는데 그녀는 철저히 가톨릭에 공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개신교를 억압하며 가톨릭교회를 회복시켰으며 1556년에 토머스 크랜머를 옥스퍼드에서 공개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온건파 가톨릭 세력인 레지널드 폴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메리 튜터가 1558년에 사망하고 배다른 자매인 엘리자베스1세(1533-1603)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모두 만족시키는 한편 종교의 문제와 관련해 최고의 권위를 여왕에게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엘리자베스의 타협정책을 통해 영국의 국가교회로 개혁 성공회를 세웠으며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두가지 성격이 강한 전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타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종교 갈등의 시대를 끝내고 심각한 종교 투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5. 가톨릭 종교개혁

트리엔트 공의회가 시작한 1454년 이후의 기간에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말합니다. 이 운동을 반종교개혁으로 부르는데,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하여, 그것에 맞서 싸우는 수단을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내부에서부터 자신을 개혁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대응하게 되었습니다. 떄문에 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인 동시에 가톨릭교회 자체의 종교개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는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명료하게 정리하였고 성직자의 행실, 교회의 질서, 종교 교육, 선교 활동과 관련해서 시급한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내부적인 개혁운동은 오래된 여러 수도회들을 개혁하고 새 수도회들(예수회)을 설립함으로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제기했던 많은 문제점들이(종교적 타락) 이 시기에 제거가 되었습니다.  

 

6. 제2차 종교개혁: 교파화 과정

이 기간에는 프로테스탄트 운동 초기에 거둔 성과를 다듬는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신학의 체계화 작업을 통해 개혁자들의 통찰들을 통합하고 정리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교파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과 같은 신앙고백들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루터 교회와 개혁파 교회 사이에서 긴장이 점차 커지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긴장 못지 않게 되었습니다. 

칼뱅이 죽은 후에 신학을 조직화하고 체계화 하는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루터파와 가톨릭의 적대자들에 맞서서 개혁주의 사상을 옹호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칼뱅이 의심스럽게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오히려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칼뱅주의 학자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견고하고 합리적 기반위에 세우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으로 다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1550년대에 루터주의와 가톨릭주의는 독일 내의 별개의 지역에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루터주의의 확장이 더이상 어려워지자 학문적인 면에서 루터주의를 옹호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루터주의가 지적인 면에서 믿음 체계에 환멸을 느끼던 가톨릭 사람들에게 루터주의가 매력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가톨릭 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을 토대로 더 정교하게 다듬은 조직신학 저술들을 앞세워 대응하였습니다. 

예수회(1534 설립)는 빠르게 중요한 지적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예수회 저술가들은 가톨릭주의를 지적으로 옹호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1560-70년대에, 칼뱅주의가 루터파가 장악했던 지역을 크게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독일의 상황은 복잡해졌습니다. 독일 지역에 루터파와 칼뱅파와 가톨릭교회가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세 교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져야 하는 압박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루터파는 다른 두 교파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교파에서 자신의 교리를 새롭게 강조하던 1559-1622년 사이의 기간을 정통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이론 체계의 합리성과 세련됨을 입증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스콜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루터주의와 칼뱅주의는 여러가지 면에서 비슷했지만 완전히 갈리는 주제가 바로 예정론이었습니다. 정통주의 시대에 칼뱅주의자들이 예정론을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루터파와 가장 확실하게 구별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 신학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

이 시기에 루터파와 칼뱅파 개혁자들은 방법의 문제에 관심이 적었습니다. 그들에게 신학은 주로 성서 주석을 의미했습니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성서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하나로 모아 체계적으로 엮어 낸 성서신학의 저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책임자였던 테오도르 베자의 저술을 통해 개혁주의 자료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제1원리를 만들어 기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2) 조직신학 저술의 발전

세 교파의 신학에서 스콜라주의가 등장하면서 방대한 조직신학 저술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필적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자신의 강점을 밝히고 다른 교파의 약점을 입증하면서 신학을 종합적으로 다듬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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