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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공부 19교시(종교개혁시대)
박준원 2020-08-11 추천 0 댓글 1 조회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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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공부 19교시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123페이지부터 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다양한 세력들>


1. 독일의 종교개혁: 루터교회


  루터파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마틴 루터(1483-1546)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의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칭의 교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종교사상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처음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을 개혁하는데 관심을 둔 학문적 운동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이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음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는 자금을 모으고자 면죄부를 판매한 일에 항거하여 그 유명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에 게시한 일이었습니다.(1517.10.31)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거짓교리를 편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의 지지자들이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다 그를 비밀리에 피신시켰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1522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대학이 아닌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개혁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새로운 사회, 종교적 질서를 열고자 하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었으며 개혁 프로그램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루터가 주장했던 <경건한 군주>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고 칼뱅의 주장한 공화주의적 정서를 더 선호하였습니다. 한 사례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루터주의가 아니라 개혁주의였습니다. 


2. 스위스의 종교개혁: 개혁교회


  개혁교회(장로교회는 여기에 속합니다.)를 낳은 스위스 종교개혁은 16세기 초에 스위스 연방 내에서 이루졌습니다. 독일 종교개혁이 학문적 성격에서 시작했던 반면, 개혁교회는 성경의 모범을 따라 교회의 도덕과 예배를 개혁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 칼뱅(1509-1564)뿐만 아니라 츠빙글리(1484-1531)와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와 같은 초기 개혁자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칭의론이 핵심이 된다고 확신했지만, 초기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교리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도, 사회, 윤리의 문제와 인문주의 운동에서 나온 개혁의 요구들과 비슷했습니다. 

  개혁교회는 츠빙글리가 전투 중에 사망(1531)한 후 그의 계승자 하인리히 불링거의 지도로 취리히 종교개혁이 안정된 때로부터 1550년대에 제네바가 이 운동의 본거지가 되고 장 칼뱅이 이 운동의 핵심대표로 등장하게 된 일로 끝났다고 평가됩니다. 1520-1560년 사이 개혁교회 내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취리히-베른-제네바) 개혁주의 목회자들을 훈련하는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1559)을 통해 확고하게 다져졌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1815년 제네바가 스위스에 합병되었지만 종교개혁 시대에는 독립도시였습니다. (때문에 스위스 종교개혁은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개혁교회의 종교이념을 보통 <칼뱅주의>라고 하지만, 현재는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3. 급진 종교개혁: 재세례파


   <재세례파 Anabaptist>말은 다시 세례를 주는 자라는 뜻이며 재세례파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만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말합니다. 재세례파는 처음 취리히 근처에서 시작하여 1520년대 초반 이 도시에서 일어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여파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내건 개혁원리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재세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콘라트 그레벨(1498-1526 )은 츠빙글리가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유아세례라든가 교회와 세속정부의 결탁, 기독교인의 전쟁 참가처럼 성경이 허용하거나 명령하지 않은 관례들을 행한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레벨은 오직 성서로만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여 개혁파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만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츠빙글리는 이 운동이 취리히의 역사적 뿌리와 개혁교회의 전통을 단절시키려고 위협하는 파괴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재세례파 운동은 다양하게 갈라져나왔지만 몇 가지 공통된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외적 권위에 대한 불신 2) 유아세례를 거부 3) 재산의 공동 소유 4) 평화주의와 무저항 운동

1527년 취리히와 베른, 장크트갈렌의 정부들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신조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발하였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자금을 기초로 이자나 수익을 주고 받아서는 안되며, 현세의 모든 물질은 공동으로 나누며 그것에 대해 온전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재세례파를 종교개혁 좌파, 급진 종교개혁이라고 부릅니다. 윌리엄스는 이들도 종교개혁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현재 신학계에서는 점차 수용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영국의 종교개혁(성공회), 가톨릭 종교개혁(반종교개혁), 제2차 종교개혁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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