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 16교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p.104.
<중세시대: 주요 신학자들2>
5. 둔스 스코투스(1266-1308)
둔스 스코투스는 중세의 가장 탁원한 지성인 중의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파리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명제 주해서] 세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용어들의 탁월한 해석으로 '명민한 박사'로 불렸으며, 기독교 신학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1)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인식론(추상/관념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사태를 보고 판단) 옹호자였습니다. 중세초기는 조명설이라는 인식론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인간 지성의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써 인식이 발생한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이 이론에 대해 스코투스는 비판하였습니다.
2) 스코투스는 신적 의지가 신적 지성에 우선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 견해를 주의설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적 지성의 우위성을 주장하였고 스코투스는 신적 의지가 앞선다는 가정을 기초로 신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공로 즉, 하나님의 상을 받을 자격으로서의 인간의 도덕적 행위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면, 어떤 근거에서 이런한 결정이 이루어지는가? 아퀴나스는 신적 지성이 인간의 도덕 행위의 고유한 가치를 알아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신적 지성은 신적 의지에게 인간의 도덕 행위에 적합하게 상을 주라고 알려줍니다.
여기에 대해 스코투스는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도덕 행위를 보상하려는 신적 의지는 그러한 도덕 행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평가가 있기 전에 이루어집니다. 이 견해는 칭의 및 예정의 교리들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3) 스코투스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무흠수태 교리를 강력하게 옹호하였습니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인간에게 공통된 죄의 조건을 가졌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스코투스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구속 사역을 통해 마리아를 원죄의 오염되지 않게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중세 말에 무흠이론이 우세하게 된 것은 스코투스의 영향때문이었습니다.
*무흠수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어떤 죄에도 오염되지 않고 수태하였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설명한 블로그입니다.
6) 오캄의 윌리엄(1285-1347)
오캄의 윌리엄은 스코투스가 주장한 견해들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주의설의 견해를 일관되게 옹호하면서 신적 지성보다 신적 의지를 우월하게 여겼습니다. 오캄은 그의 철학적 견해로 인해 기독교 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설: 하나님은 신적 의지의 행동에 의해 어떤 행동의 공로적 가치를 판정한다는 견해로 오캄의 윌리엄은 하나님의 자유를 옹호하여, 하나님은 어떤식으로든 인간의 행동에 합당하게 보상하는 일에서 자유로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 행동의 도덕적 가치와 공로적 가치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1) 오캄의 면도날: 절약의 원리라고도 부릅니다. 오캄은 단순성이 신학과 철학의 미학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면도날을 사용해서 불필요한 가정들을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의 칭의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중세 초기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해 '창조된 은총의 습성'이라는 것을 도구로 삼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창조된 은총의 습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주입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적인 초자연적인 실체를 말합니다. 오캄은 이런 생각이 적합하지 않고 불필요한 요소로 보아 거부하였으며, 칭의란 하나님의 직접 죄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용납하는 데는 이러한 매개체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매개적 실체를 통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을 오캄은 창조된 은총의 습성 같은 매개 수단이 없이 직접적으로 발생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칭의를 종교개혁에서 제안하게 되는 식으로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2) 오캄은 유명론의 열렬한 옹호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사용한 면도날 때문이이었습니다. 그는 보편을 전혀 필요 없는 가정이라고 단정하고 제거해 버렸습니다. 서유럽에서 근대적 방식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오캄 덕택이었습니다. 그의 사상 가운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두 능력의 변증법입니다. 이 이론을 통해 오캄은 사물이 현재 존재하는 방식과 선택 가능했었던 존재 방식을 대조할 수 있었습니다.
*유명론(네이버백과사전)
명목론(名目論)이라고도 한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는 실재론과 대립하여,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개개의 사물이며 보편이란 단지 '개개 사물의 배후'에 그것들에 공통되는 명사로서 붙여진 일반적인 기호나 이름(라틴어 nomina)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추상물이라고 하는 입장. 실재론과 유명론의 이러한 대립은 '보편 논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실재론에 대항한 유명론의 대두는 가톨릭 교회의 스콜라 철학의 권위에 도전한 합리적 기성, 즉 경험적 제 과학을 육성한 사조(思潮)의 승리를 예고하면서 스콜라 철학의 붕괴를 촉진하였다.
유명론적 견해의 대표자로는 11세기 영국의 로스켈리누스와 13세기, 같은 영국에서 이성과 신앙을 분리한 이중진리설을 주창한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윌리암 오컴을 들 수 있는데 오컴은 이성과 신앙을 구분하여 감각에 부여된 개개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만이 확실한 인식이며 보편은 단순한 언어에 불과하고, 신이나 영혼 등은 신앙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경험적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유명론은 “중세에 있어서 유물론의 최초의 표현”(마르크스)이었으며 근세 초기의 영국 경험론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 입장은 개개 사물과 보편의 상호 결합이라는 변증법적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보편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올바른 입장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결점은 주관적 관념론에 이어진다. 일반 개념이 어떠한 실재적인 것을 반영하지 않고 단순한 약속 기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현대의 의미론 철학의 입장 속에서 유명론이 관념론적으로 부활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명론 [Nominalism, 唯名論]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7)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469-1536)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 사상가로 인정받는 에라스무스는 16세기 전반기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새로운 인쇄 매체를 활용한 최초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6세기 종교개혁을 위한 지적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으며, 특히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서를 인쇄본으로 펴내고 교부 사상가들의 많은 문헌을 출판하는 등 광범위한 출판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위한 지침서]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종교 출판물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시대의 교회가 힘을 모아 성경과 교부들의 저술로 돌아갈 때에야 개혁을 이를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규칙적인 성서독서를 통해 새로운 평신도 신앙을 열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평신도 신앙을 기초로 교회가 개혁되고 갱신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을 평신도를 위한 성서 지침서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철학에 대한 간단하지만 깊이 있는 주석을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철학이란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실천적 도덕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며, 그에 따라 성서 독자들은 악은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법이며,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신앙을 단순히 도덕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문주의적 관점에서 내적 종교를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서 독서가 독자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주요한 두가지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최초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신학자들이 신약성경 원문을 직접 다룰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후 폭발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을 포함하여 교부들의 문서를 신뢰할 수 있는 판본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학자들은 [명제들]로 알려진, 간접적이고 맥락을 무시한 인용문들을 의지하는 데서 벗어나 그 주요 문헌들의 온전한 본문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닌다.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시대의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중세시대의 주요한 신학적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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