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시대 : 주요 신학적 논쟁과 발전>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p.61-
5) 삼위일체 교리
그리스도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므로 삼위일체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셋은 신성에서 동일하고 지위에서 동격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동격은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확립되었으며 성령의 신성은 이 공의회 여파로 아타나시우스와 바실리우스의 저작들을 통해 확립되었습니다.
동방교회의(그리스어권) 견해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고찰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성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험적 삼위일체)
서방교회의(라팉어권) 견해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해 하나님의 사랑이 함축하는 의미들을 탐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었습니다. (지성적 삼위일체)
6) 교회론: 도나투스 논쟁
서방교회 안에서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한 문제로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도나투스파는 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기독교공동체로(현 알제리) 로마교회가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회원 자격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는데 교회란 성도들의 모임이며 죄인들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쟁정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시작하여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회심할 때까지 지속된 박해로 말미암아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이 박해 기간 동안에 성서를 소지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서사본을 로마당국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들은 박해에 굴복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정죄를 당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와 비슷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박해가 끝난 후 이 변절자들(성서를 넘겨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지만, 도나투스파는 그들을 쫓아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러워진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는 다른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성도와 죄인들이 섞인 몸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내세워 박해나 다른 이유로 실수한 사람을 내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교회 사역의 타당성은 그 일을 수행하는 목회자의 성결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달린 것으로 목회자가 부적합하다고 해서 성례전의 타당성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교회 규범으로 인정되었으며 교회 본질과 목회자에 대한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은 최초로 교회에 관한 교리 및 성례전의 효력 같은 문제들을 다룬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비롯된 많은 문제들이 종교개혁 시대에 다시 등장하게 되면서 교회론의 쟁점들이 다시 부각되게 됩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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