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1서>
- 들어가는 질문
1)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어떻게 연결짓고 있나요?
2) 요한이 경계한 이단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3) 요한은 이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하나요?
- 내용해설
1) 하나님은 사랑이라
요한은 요한1, 2, 3서를 차례로 써 보냈습니다.
요한은 사랑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7-8)
요한은 하나 사랑의 특징을 '먼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0)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따라 사랑이고 나중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따라 사랑이고, 우리가 형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나중 사랑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나무 줄기라면, 이웃 사랑은 줄기에서 옆으로 쭉 뻗은 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요한1서는 유독 형제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특히 궁핍하고 어려운 형제를 외면하는 행위를 따끔하게 비판합니다. (요일3:17)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4:20)는 유명한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요한서신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대단히 깊고 심오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서신을 읽을 때는 한문장 한문장 깊이 묵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2) 이단에 대한 경계
요한1서에서 다루는 두번째 주제는 이단 문제입니다. 요한이 사랑을 강조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면, 혹 이단이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쉽게 넘어가지나 않을까 오해할 수도 있지만 요한은 이단이나 거짓 교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한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들을 적그리스도, 미혹하는 자, 거짓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당시 유행하던 이단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요즘으로 보면, 신천지(이만희)나 하나님의교회(안상홍/장길자) 만큼 유명한 이단입니다. 영지주의 주장은 <물질과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 좋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육체를 감옥으로 생각하여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이론이 기독교 교리에 들어오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성육신도 부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부인했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도 부활도 진짜 육신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진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만 가짜 육체로 오셨다는 가현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교리의 뿌리를 흔드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었기 때문에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에 대해 단단한 주의를 당부합니다.
3) 요한의 이단 퇴치법
요한의 이단 퇴치법은 분별법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영이고 적그리스도의 영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 누가 빛이고 어둠인지 가려내야 합니다. 마치 진짜 꿀과 가짜 꿀을 가려내는 것처럼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려 내야 합니다.
요한은 적스리스도를 분별하는 기준을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느냐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영지주의 이단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은 서신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이 몸으로 오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말합니다. 진짜 꽃인지 가짜 꽃인지 알려면 직접 만져 보면 압니다. 요한도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보고 만져 본 결과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중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고 몸의 부활을 강조한 것도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고 만든 구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몸의 부활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지만, 이단에 대한 단호함은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신앙의 분별력을 잃을 수가 있고, 이단분별을 강조하다 보면 사랑의 마음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과 분별, 온화함과 냉정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1서는 한편으로는 사랑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한계를 강조한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묵상
1)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한 적은 없는지요?
2) 이단이 끈질기게 달라붙을 때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3) 주변에 이단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왜 이단에 빠지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요한2서>
요한2서는 한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편지입니다. 요한은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이번에는 한층 더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누그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한2서1:10-11)
이단자에게 인사하는 것도 이단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초강경 조치입니다.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예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인데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교묘하고 끈질기고 고단수입니다. 이단은 바늘 끝만한 빈틈이라도 보이면 집요하게 파고들고, 조그만 약점이라도 보이면 물고 늘어집니다. 웬만한 성경 실력으로는 이단의 논리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단과 논쟁하는 것, 대화하는 것, 접촉하는 것은 위험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단과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요한이 공중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마침 당시 영지주의 이단의 우두머리 케린투스가 목욕탕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요한은 목욕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기 이단자가 들어와 있으니 목욕탕의 지붕이 무너질 것이요'하고 고함을 지르고 목욕탕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요한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단은 송충이를 털어 내듯이 속히 털어 내야합니다.
<요한3서>
1) 순회전도자를 영접하라
요한3서도 한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편지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구하는(요한3서 1:2) 말씀은 한국교회에서 흔히 삼박자 축복이라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당시 편지를 쓸 때 흔히 쓰는 단순한 인사말이었다고 합니다.
요한3서의 주제는 삼박자 축복이 아니라 순회전도자를 어떻게 대접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4절에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그네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독교 초창기에는 목회자들이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순회 전도자라고 합니다. 순회전도자가 교회를 찾아가면 교회는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종종 푸대접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요한이 이런 폐단을 시정하고자 편지를 쓴 것입니다.
2)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요한3서에는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디오드레베는 악하고 교회의 걸림돌인 인물이고 데메드리오는 선하고 교회의 주춧돌인 인물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순회전도자들을 섭섭하게 만든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을 접대한 교인들을 데려다가 혼을 내고 교회에서 내쫓는 일까지 자행하였습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자기가 항상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고 자기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고 자기 말을 잘 안듣는 사람은 괴롭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순회전도자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요한도 데메드리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요한은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11절)'고 권고합니다.
또 한편으로 어느 한 사람의 신앙 성품에는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성경연구하는 모임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다가 혀가 꼬여 '가벨'이라고 발음하여 모두 박장대소를 하였는데 '가벨'이라는 말 속에 깊은 진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가인처럼 악한 구석도 아벨처럼 선한 구석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칼로 무 베듯이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이 딱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선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는 요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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