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신구약문지방넘기/오종윤 목사)
코로나 때문에 요즘처럼 우울할 때, 빌립보서를 추천해 드립니다.
감옥에서도 기뻐하라를 외쳤던 바울의 그 기쁨의 신앙을 함께 배워보고자 합니다.

<내용 해설>
1.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이지만 분위기는 화창한 봄날같이 환하고 밝습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는데 <기쁨, 기뻐하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감옥은 지내기가 매우 불편한 곳입니다. 도저히 기쁨의 찬양이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바울에게 근심스러운 일이 또 생겼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에바브로디도가 중병이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가 죽는다면 여러가지로 덕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에게도 큰 상처가 될 것이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비난거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이러한 자신의 심정을 '근심 위에 근심'(빌2:27)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에바브로디도는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근심 위에 근심이 변하여 이제는 기쁨 위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계속 사용합니다.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두번씩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두번 반복함으로 최고의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에게 또 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립보교회와의 좋은 관계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빌립보교인들은 영치금과 옷, 책 등을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주었습니다. 바울은 선물을 받고 감격해서 감사의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2. 빌립보서는 또한 죽음의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편지입니다.
죽음에는 실제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영적인 죽음은 자신의 혈기와 고집과 악습을 다 버리고, 철저하게 예수님께 굴복하는 자기부정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는 이 두가지 죽음을 모두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먼저 실제적인 죽음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언제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형편이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 진지하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였습니다. 죽어서 순교자가 될 것인가? 살아남아 계속 복음을 전할 것인가?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둘 사이에 끼어 있다(빌1:23)'고 표현합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밤낮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얻은 결론은 죽는 것도 좋고, 사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죽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순교자로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니 좋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살아남게 된다면 계속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니 사는 것 또한 좋습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빌1:20)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런 과정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니 바울의 심령 속에 기쁨이 밀물처럼 밀려 왔습니다.
다음은 자기부정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바울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한 전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도 기뻐합니다. 동기는 불순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때문에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일에 대해 뒤집어 생각하기를 합니다. 감옥에 갇힌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감옥에서 로마 관리와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니 감사한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바울의 영향력을 능가하기 위해 전도하는 일도 뒤집어 생각하면 오히려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니까 이것도 역시 감사할 일입니다.
뒤집어 생각하기! 참으로 좋은 방법입니다.
3. 나는 똥덩어리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유익한 것으로 여기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이제는 똥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부정을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학문도 똥이고, 바울의 지식도 똥이고, 사회적 신분도 똥이고, 바울의 열심도 똥이고, 바울 자신의 생명도 똥, 나는 냄새나는 똥덩어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산, 직장, 명예, 감투, 자존심, 경력,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바울은 모두 똥덩어리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무엇으로 여기고 있나요?
4. 비움의 그리스도론 (케노시스 그리스도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빌2:5)
바울은 빌2:5-11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또한 자신을 낮추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케노시스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릅니다. 케노시스는 텅 비움이라는 뜻입니다. 욕심도 없고, 자랑도 없고, 집착도 없는 상태입니다. 바울이 사모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텅 비워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자기부정의 경지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3:12-13) 바울의 신앙은 완성된 것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한고, 아직 채워야 하고, 더욱 노력해야 할 미완성의 신앙입니다.
5. 손할례당
바울은 빌3:2에서 손할례당이라는 말을 씁니다.
유대인 출신들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들을 할례당이라고 부르면서 은근히 자랑하고 과시를 하였습니다. 할례당은 헬라어로 '페리토메'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비꼬아서 손할례당이라고 부릅니다. 손할례당은 '카타토메'입니다. '잘라내다, 토막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손할례당은 할례당을 꾸짖기 위해 바울이 부른 별명입니다.(토막당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할례당이 아니라 토막당이다!! 어떻게 보면 독설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종종 거친 표현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할례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할례 받은 것만 자랑하고 다니는 할례당에게 토막당이라고 바울은 꾸짖었습니다.
<말씀 묵상>
1) 나에게 기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나는 예수님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도 기꺼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을까요?
3) 자신을 비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도) 사랑의 하나님, 코로나로 참으로 온세상이 우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관계의 문제 모든 것이 어려운 때입니다. 감옥에서도 기쁨을 외쳤던 바울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환경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뒤집어 생각하는 습관을 허락하여 주시고 자기부정을 통하여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아니면 배설물이었는지 분별하게 하여주옵소서. 죽음을 넘어섬으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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