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8일 고난주간 수요일 새벽말씀묵상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시겠습니다.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누가복음 10장25-37절 말씀입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라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제목: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복음으로 사는 길’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만들어진 법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법, 또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입니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핀란드, 폴란드 등에서 구조불이행을 처벌하는 법규로 제정되어 있습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구조불이행시 프랑스에서는 징역 5년이하, 폴란드에서는 징역 3년 이하의 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06년에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로 제정이 되어 사람을 돕다가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유래가 된 법입니다.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도덕법만이 아닌 현행법으로도 죄가 된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성경말씀입니다.
법으로까지 제정될 정도로 예수님의 강력한 이 말씀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출발은 어떤 율법학자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의도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이죠.
“선생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의 의도는 자신은 다 안다는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성경적 지식과 깊이를 자랑질하려는 좀 재수없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겠지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는 절대 이리 싸가지 없는 질문을 못했을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유대사회에서는 어떠한 질문도 허용이 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싸가지없고 말도 안되는 질문이 허용되고 용납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불이익도 없다고 하니, 정말 질문의 나라라 불릴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속아 넘어가 주십니다. 그래 율법에 뭐라하더냐?
그랬더니 율법학자는 신이 나서 성경을 줄줄 외어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율법학자에게 해 주십니다.
28절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학자는 성경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쪽 믿음입니다.
눈치없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이 속깊은 말씀을 새겨듣기는커녕 더 자랑질하고 싶어서 다시 질문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이 사실 오늘 비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지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오직! 유대인입니다. 상당히 배타적 민족주의, 가족주의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모두 개, 돼지들입니다. 지옥의 땔깜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율법학자의 의도된 질문에는 우리의 이웃은 오직! 유대인 뿐임을 과시하고 유대인만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임을 다시 한번 자랑질하려는 속셈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게 왜곡되고 편협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유대인 율법학자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가 진정으로 영생을 소유한 자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 유대인이 (문맥상으로 보면 그는 유대인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 거의 죽을 정도로 맞고 버려졌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때 마침 제사장이 지나가다, 달려가서 그를 일으켜세우며 도와주어야할 제사장이, 또 레위인이 그냥 지나칩니다.
얼마나 강력한 말씀입니까? 완전 요즘말로 하면 사이다 발언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세가 얼마나 기세등등하던 시대였습니까? 대제사장 말 한마디면 살고 죽는 시대였습니다. 독재정권시대에 독재자의 자존심을 욕보이면 정말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십니다. 자존심을 꺾어놓으십니다.
그리고 뒷이야기가 그들이 들으면 오장육부가 뒤틀릴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때마침 사마리아사람, BC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했을 당시 앗수르의 정책 중의 하나가 북이스라엘을 흡수하기 위해 혼혈민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앗수르인들을 보내어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 후 남유다 사람들은 그들을 개, 돼지 취급하면서 사마리아사람들을 이방인과 똑같이 취급하였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사람이 왜 하필이면, 강도 만난자를 도와주어야 할까요?
예수님 이야기에서 제사장이 도와주고 레위인이 거들어 주면 얼마나 폼나는 이야기가 될텐데 말입니다. 은근히 그들의 기도 살려주고 예수님도 기득권세력에게 인정받는, 일석이조, 꿩먹고 알먹는 이야기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들이는 이야기로 진행하셨던 것일까요?
사마리아인이 지극정성으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장면은 너무 감동적이기 까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 율법학자의 굳어진 사고로는 강도만난 유대인의 이웃은 유대인 제사장이고 유대인 레위인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만 자기 입으로 강도만난 유대인의 이웃이 사마리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방인이 이웃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건입니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단순히 이웃 사랑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유대인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이야기입니다. 유대민족주의, 가족주의의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우리 가족만 내새끼! 우리 한교회만 내식구! 우리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 우리는 눈을 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우리 가족과 성도들부터 돌보라는 권면의 말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오직! 유대인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개취급하는 사마리아인도 너희의 이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유대인보다 더 선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주간 거룩한 불, 말씀의 불이 붙기를 사모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되어 우리가 금을 그어놓았던 사람들, 당신 절대 여기 못넘어와! 금을 그어놓았던 공동체와 그룹들도 우리의 이웃임을 인정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고통받고 있는 현장이 어디든지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달려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도 기장총회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공동기도로 마치겠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는 참담한 현실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얻게 하옵소서.
생명의 빛으로 우리의 길을 안내해 주셔서,
혼란과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따뜻한 햇볕과 봄기운으로 꽃들은 아름답게 피어가지만
거리는 한산하고 경계하듯 바라보는 눈빛은 마음을 좁게 하며
세계는 서로에 대해 혐오와 폭력적인 언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혐오와 분열이 아닌 위로와 격려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온전한 세상을 회복시키게 하옵소서.
서로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가족과 이웃을 돌보게 하옵소서.
세계 각지에서 사역하며 헌신하는 해외 선교 동역자들과
가정에 건강과 안전을 주시고 주의 손길로 위로와 평안을 주옵소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하옵소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그 유족들과
현재 치료를 받는 분과 의료진 모두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세계의 모든 지도자가 국민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연합하게 하옵소서.
육체적·정서적 위기를 겪고, 생계를 걱정하며,
노동과 육아 가운데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소망을 내려주옵소서.
함께 예배하고 일상의 기쁨을 허락해 주시기 바라며,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고
거룩한 말씀의 불이 여러분의 심령을 사로잡아
복음의 능력으로 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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