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6(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리디머 장로교회(뉴욕50/8000), 가장 생기 넘치는 교회
서론: 다시, 기도를 말하다
이 시대에 신학적/ 예배 의식용/ 실천적 이 세 가지를 담아내는 기도서가 필요하다! (신학적, 경험적, 방법론적 접근이 가능한 책!)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다? (기도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첫 번째, 기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과 하나 됨을 경험하는 수단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평안한 삶과 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누리는 안식을 중요시 한다.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간증을 합니다. (감성중심의 기도)
두 번째, 기도의 핵심은 내적인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부르심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도를 하나님이 계심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드리는 씨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도를 하며 그분의 실재를 경험할 수 없다는 기본전제를 깔고 시작합니다. (이성중심의 기도)
어떤 부류들은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라는 가르침을 배격하고 그런 생각 자체가 기도를 이기적인 행위로 만들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기도의 지상목표는 평화로운 자아 성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과 각 자의 삶 가운데 실현되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뜨거운 간구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묵상하는 것이 나이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관점, 즉 교제 중심의 기도(평화로운 경배)와 하나님 나라 중심의 기도(적극적인 간구) 중 어느 기도가 바른 기도일까요?
기도란 만남인가 간구인가?
*성경적 관심
기도로 가득한 시편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시편은 이 두 가지 기도 경험을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27, 63, 84, 131편, 그리고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146-150편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교제하는 기도를 보여줍니다.
(시27:4)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36:1-3)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 장면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반면, 시편에는 불평하고,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세상에 거룩한 권능을 보여주시길 요청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노골적으로 호소하는 노래도 있으며 온 몸으로 씨름하는 기도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0, 12, 39, 42-43, 88편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10편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시10)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4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하나님 나라 중심 기도라는 씨름 시합의 전형적은 모습입니다. 예배 때 사용하는 시편(교독문)은 교제를 청하는 기도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간구 모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을 돌아보며 무엇이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을지라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중보자가 되시므로 과감히 거룩한 보좌 앞에 나아가 필요를 채워 주시길 간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성경은 이처럼 양쪽의 기도를 신학적으로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종류의 기도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는 간구로 가득 차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경배가 간구를 포함하듯,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 또한 주님을 알고자 하는 간구를 아우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세례문답)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유명한 문장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와 교제하는 기도를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 본질이 하나임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할지라도 그분의 실재가 온 삶을 통틀어 가장 큰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게 아닙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 역사 속에 위대한 신앙인들도 기도 관련 저작들을 보면 어느 한 쪽에 완전히 치우치는 경우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그렇다면 어디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까요?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는 자세와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추구하는 마음가짐 사이의 한 지점에다 기도를 무리하게 끼워 넣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룰 이야기는 기도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동시에 만남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대화와 만남이라는 개념은 기도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동시에 기도 생활에 깊이를 더하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찬양, 고백, 감사, 간구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기도방식은 신령한 경험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전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경외감에 사로잡히고, 거룩한 은혜 가운데 친밀한 관계를 의식하고, 씨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라는 영적인 현실로 이끄는 요소들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인생길을 마칠 때까지 드려야 할 기도의 주된 요소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기도란?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입니다.
20190703(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리디머 장로교회(뉴욕50/8000), 가장 생기 넘치는 교회
제1부 바른 기도를 꿈꾸다
1장 기도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부제: 인생 후반부에 기도를 체험하다)
<기도 말고는 답이 없다!>
1999년 가을, 9.11 사태가 터졌습니다. 암울한 기운이 몇 주간이나 뉴욕을 짓눌렀습니다. 온 도시가 우울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 캐시는 크론병 증세로 씨름을 하였고 급기야 나마저도(팀 켈러 목사)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던 어느 날, 아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매일 밤마다 빠지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기도를 하지고 말했습니다. 가끔 한 번도 아니고 매일 그러자는 것입니다. 엄두조차 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한 가지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불치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봐요. 의사가 약을 주면서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알씩 먹어야 하고 거르면 몇 시간 안에 죽는다고 경고하는 거예요.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고요. 깜박할 수 있을까요? 목숨이 달린 일이니 절대 잊을 수가 없죠. 우리 부부가 함께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눈앞에 닥친 일들을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해요. 무심코 지나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 불이 반짝 켜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고 또 해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제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미국 남부 출신의 유명한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스물한 살 때, 깊은 기도 생활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1946년 오코너는 손을 기도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에 위대한 작가가 되려는 몸부림을 차곡차곡 기록했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성공하고 싶다. 너무나 성공하고 싶다.’ ... ‘주님의 사랑으로 벅차기 보다는 예술적 기교를 닦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초승달입니다. 내 자아는 둥근 달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스스로 길을 막고 선 탓에 난 하나님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오코너는 기도 일기를 쓰는 가운데 잘 살고 못 사는 건 사랑의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성공을 더 사랑하는 마음은 마음에 각질을 입혀 감정과 감각을 마비시켜버립니다. 오히려 더 형편없는 예술가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비범한 재주는 오히려 오만과 이기적인 작가로 변질됩니다. ‘오 하나님, 제발 내 생각을 투명하게 해 주세요. 정결하게 씻어 주세요. 제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명상센터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
비틀즈가 동양의 명상에 눈길을 주면서 순식간에 대중화의 물꼬가 트인 뒤로 제도 종교의 쇠락과 맞물려 꾸준히 확장세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유명인사가 몇 달 동안 명상수련원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놓치지 않고 심도 깊게 다루어 내보냅니다. 유명인사들은 하나같이 명상을 하면 모든 면에서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롬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니
벧전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워야 한다>
오코너가 탄식하듯이 우리는 정말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을까요?
갑상선암 수술을 무사히 마치자마다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네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몇 달에 걸쳐 시편을 통독하면서 한 편 한 편을 요약하고 정리했습니다. 덕분에 시편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는 습관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째, 성경을 읽은 다음, 기도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셋째, 아침만이 아니라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넷째, 더 큰 기대를 품고 기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의 돌파구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기도를 논하기엔 자신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영국 저술가, 포사이스는 기도에 대해 쓴다는 것은 어렵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일이다. 마치 언약궨에 손을 대는 기분이다.
기도는 참다운 자기 인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마음의 변화, 사랑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주요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해 마련하신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놀라운 선물을 수없이 베푸시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안전하게 공급하시는 파이프라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마침내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는 길입니다.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찌 되어야 하는지 빠짐없이 알려 주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20190710(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리디머 장로교회(뉴욕50/8000), 가장 생기 넘치는 교회
제1부 바른 기도를 꿈꾸다
2장 기도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부제: 하나님 앞에선 어떤 문제도 하찮은 것이 된다)
<기도는 세상을 거스른다>
(엡1:15-19)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서 1장, 골로새서 1장, 그리고 에베소서 1장과 3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바울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간구하는 핵심은 기도의 위대함과 중요성에 대한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17-18절에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서 믿음의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환경을 바꿔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구주고 고백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수많은 위험과 고초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위협과 박해, 질병과 이별 등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큼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바울은 요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도제목 리스트에 올려놓고 요청했음직한 온갖 유익한 조건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구하는 게 그릇된 기도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과 악에서 구해 주시길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울이 일상의 필요를 구하지 않고 소중하게 붙잡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더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 전체를 움직이는 중앙 관제소에 해당합니다. 인간의 감정과 사고, 행동을 좌우하는 헌신과 사랑, 소망이 한데 모인 저장창고와도 같습니다. 어떤 진리로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인간의 삶 전 영역에 파고들어 전인격을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얻어야 할 결정적인 응답은 환경의 변화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실재를 강렬하게 감지하지 못한다면 좋은 환경은 지나친 자신감과 영적인 무관심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밝아진 마음이 없으면 좌절과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더 잘 아는 거시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하는 일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최고의 선으로 여겼습니다. 풍성하고 생기 넘치며 위안을 얻으며 애써 지키는 기도생활이야말로 온갖 선한 것들을 제대로 받아서 그 유익을 누리는 길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을 받는 통로만이 아니라 그분을 더 잘 알아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기도는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사64:7) 행위입니다. 18년 된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표면적인 생활을 염두하면서 내면생활을 가꾸어 갑니다. 남들의 평가, 사회적 지위, 물질적인 번영, 성과 등에서 내면의 평안을 찾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면생활을 첫 번째 우선순위로 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반대가 될 때,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외면생활에 우선순위를 두면 내면생활은 어둡고 주눅이 들게 마련입니다. 내면생활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한 백이면 백 위선에 빠지고 맙니다. 17세기 영국신학자 존 오웬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하였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모아 예배당을 채우고, 성찬예식을 인도하고, 대중의 입을 채워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진면목은 은밀한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느냐에 달렸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면 지켜보는 눈길이 전혀 없을 때, 이러저러한 상념에 잠기도록 몰아가는 압박 요인이 전혀 없는 순간에 무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는가? 잘난 체하지 않는 겸손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가? 밝고 긍정적인 인물로 비쳐지길 바라는가?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는가? 삶에 기도가 빠져 있다면 우리의 모습은 위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있는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전에 예수님은 몇 가지 기도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데서 이뤄지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이야말로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영적 시험지입니다. 흔히들 형편이 어려워져 걱정이 많을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참으로 친밀하고 활력 넘치는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무릎을 꿇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외부의 압박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내면에서부터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치는 법입니다. 보상이 전혀 없더라도 영적으로 메말랐다 싶으면 당장 기도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친구 목사인 잭 밀러는 기도를 잘 들어보기만 해도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주님과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단박에 드러나거든!’ 내가 보인 일차적인 반응은 그 친구 근처에서는 절대 소리를 내서 기도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개인적인 기도생활을 풍성하게 하지 않더라도 공적으로는 화려하고 은혜로우며 열정적인 기도를 드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대화하는 상황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특징만큼은 흉내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어떠한 기도를 드리는가? (자신/자녀)
환경의 변화를 위해서 / 주님을 더 알기 위해서
2. 나는 외적생활과 내적생활 중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가?
3. 개인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
20190724(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리디머 장로교회(뉴욕50/8000), 가장 생기 넘치는 교회
제1부 기도를 분별하다
제1장 기도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부제: 참된 기도는 본능을 넘어 하나님의 선물이다)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본능, 기도>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는 기도를 신앙의 핵심으로 꼽는다. 유대인들은 하루 ( )차례 기도하지만, 무슬림들은 매일 ( )차례 기도하는 계율을 따릅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기도를 드립니다. 즉, 기도는 인간의 삶에 두루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2004년 기도에 관련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무신론자들 가운데
( )퍼센트는 ‘가끔’ 기도하며, ( )퍼센트는 규칙적으로 기도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신앙 행위를 사회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보면, 날마다 기도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비율이 굉장히 높으며 하루 몇 차례씩 기도한다는 응답자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절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기도는 범세계적인 현상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신앙이나 기도가 완전히 사라진 문화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사이의 소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내면에는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숨어 있을 가능성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불치의 향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도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모든 기도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나타나는 가지각색인 기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채로운 기도 유형>
인류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와 심리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기도란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의 힘을 통제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과학이 출현한 지금은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말라비틀어질 것)
또한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칼 융은 기도가 밖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정신적인 명상을 통해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 밖에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부인하였습니다.
<내면을 향하는가? 밖을 향하는가?>
프로이드나 융 학파는 인격적인 신에게 드리는 간구보다 명상을 더 세련된 기도로 여기도 있는 반면에, 독일 종교학자 프리드리히 하일러는 내면에 초점을 맞춘 신비적인 기도와 밖을 향하는 예언적인 기도를 설명하면서 예언적인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하일러의 연구에 따르면, 동양 종교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신비주의는 신과 기도하는 인간 사이의 격차를 좁혀서 ‘인성이 사라지고 신성이 가진 무한한 조화 속으로 들어가 궁극적인 존재가 되게 합니다. 때문에 고요하고 평온하며 입을 열지 않는 명상을 으뜸가는 기도 유형으로 보았습니다. 명상에 들어가면 신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의 일부가 됩니다. 반대로 격정적인 부르짖음으로 드리는 예언적인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 시편 기자, 사도들과 예수님에 관한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도의 유형입니다.
하일러가 구분한 두 종류의 기도는
1) 신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차이가 나타납니다. 신비적인 기도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내재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그리고 만물 가운데 머물며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신성한 존재와 만나는 주요한 통로가 됩니다. 정교회 신학자 앤터니 블룸은 <기도의 시작>이라는 책에서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강조합니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다면 바깥에서 그분을 만날 기회는 더 희박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할 곳은 내면입니다. 반면에 예언적인 기도는 초월적이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타자로서의 하나님에게 중점을 둡니다.
2) 또 다른 차이점은 은혜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신비적인 기도는 공로, 즉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신이 보이는 높이까지 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 거룩한 존재와 하나가 되는 길고 긴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적인 기도자들은 자신을 정화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주님의 은혜에 기대는 일입니다.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내면에서 행하시는 역사라는 뜻입니다. 예언적 기도의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다가서듯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데 있습니다. 신비적인 기도가 고요함 속에 누리는 평안이라면, 예언적인 기도는 입술의 찬양과 강렬한 감정의 분출입니다. 신비적인 기도가 자아와 신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쪽이라면, 예언적인 기도는 자신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차이를 더욱 뼈저리게 경험하는 방향으로 데리고 갑니다. 죄로 가득한 본성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죄로 물든 인간이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하여 힘차게 찬양합니다. 반면에 신비적인 기도자들은 간구로 시작하여 고백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침묵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명상으로 들어갑니다. 예언적인 기도자들은 묵상과 간구, 감사와 고백, 찬양이 동시에 이뤄진다고 봅니다.
<기도는 신비적이면서 동시에 예언적이다>
어느 힌두 사제는 사마디(황홀경)에 이르면 ‘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만 남는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대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간구의 본질은 똑같다는 주장은 여러 위험한 요소를 가지게 됩니다.
하일러는 인격적인 소통이 사라진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기도가 낫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기도란 침묵 가운데 신비롭게 이뤄지는 만남이 아니라 말을 주고받는 일종의 대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가운데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나 그분의 영광과 사랑을 고요히 묵상하는 노래들도 적지 않습니다.
(시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도 자신의 영적 일기에 다음과 같은 신비적인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937년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감미롭고 온화한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자신이 비어지고 지워지고 괴멸되어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또 다른 일기에서는 ‘성경은 마치 진수성찬 같아서 계속 읽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주 한 구절에 오래 머물며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맛보곤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말씀에 경이와 기적이 차고 넘치는 듯했습니다.’
에드워즈의 고백은 신비적인 동시에 더없이 예언적입니다. 하일러가 강조한 예언적 기도 또한 중요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그 경이롭고 신비한 체험으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반응이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모든 인간에게는 신적인 존재를 알아보는 지각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심중에는 신성을 감지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하나님은 간혹 믿지 않는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주권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반응입니다.
첫 번째 차원의 기도는 어디든 대고 도움을 구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본능으로 불분명한 하나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차원의 기도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는 순간, 자녀의 신분이 되었으며 하늘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음을 영적인 선물로 받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과 온전한 대화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도 위급 시에 도움을 요청하는 구조 요청 신호탄이라면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과 참되고 인격적이 대화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참모습까지 드러나게 되어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만남으로, 진실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때문에 기도란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과 은혜로 시작하신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가서 마침내 주님과 온전히 만나는 단계에 이르는 일을 말합니다.
욥기에서 욥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로 반응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게 되면서 비로소 영적인 눈이 열리게됩니다. 기도는 열심 또는 기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해를 바라보려면 필터가 필요하듯이, 성경에 드러난 예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대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20190731(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리디머 장로교회(뉴욕50/8000), 가장 생기 넘치는 교회
제2부 기도를 분별하다
제4장 소견대로 하는 기도는 비극이다
(부제: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기도의 출발이다)
<하나님 말씀에 풍덩 뛰어들라>
기도를 하려면 먼저 성경을 펴고 그 간구를 들으실 분에 관해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깨달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갓난아이들도 같은 원리에 따라 성장해서 어른이 됩니다.
유진 피터슨은 ‘아주 어려서 말을 배우는 인간들은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자기 힘과 의지로 말문이 열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을 걸어 옵니다. 그렇게 말해 주는 이가 있기에 말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언어의 바다에 풍덩 빠집니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서서히 응답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엄마, 아빠, 빠빠(밥), 좋아, 싫어...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첫 번째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의 말은 모두 응답하는 말입니다.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말하는 법입니다.’ 즉, 인간은 들은 만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까막득히 앞섭니다.’라는 사실을 가슴깊이 새기는 것이 기도 훈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들려주는 말씀의 바다’, 즉 성경에 풍덩 뛰어들어야 합니다. 마음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때까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부끄러움, 기쁨, 혼란, 하소연 등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하나같이 참된 기도이며 마땅히 주께 드려져야 할 간구입니다.
기도의 목표가 진실하고 인격적인 교제라면, 온 마음을 다해 성경에 기록된 한 구절 한 구절에 깊이 몰입하는 것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갓난아이가 말을 배우듯 더딜지 모르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시간을 꼬박꼬박 갖기만 하면 우리의 기도 수준을 날마다 성숙해질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감격하고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당황스러운 사태 또한 만나기도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 일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결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경과 기도는 한 덩이가 되어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줍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다채롭다>
시편 기자는 그야말로 온갖 형태의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탄성, 불만, 따지는 듯한 어조, 호소와 요청, 자책 등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대화 형식과 마음가짐, 감정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자유로운 방법은 오로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에 반응하며 기도해야만 가능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위엄이 넘치면서도 자비롭고, 거룩하면서도 너그러이 용서를 베풀며, 사랑이 넘치는 동시에 사람의 지혜로 가늠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에는 친구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처럼 보이는 기도도 있지만, 위대한 왕에게 호소하는 유형이나 마치 씨름 경기와 비슷한 기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따라 기도의 성격이 가지각색으로 결정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버지, 연인, 목자, 또는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기도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응, 또는 응답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기도생활은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때에만 풍성하고 다채로워질 수 있습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드리는 기도의 비극>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기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반면, 앤 라모트가 쓴 <가벼운 삶의 기쁨>은 기도의 다른 방법을 알려줍니다. ‘누구한테 기도하느냐 따위의 문제에 발목을 잡히지 말자.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생기 넘치는 사랑의 에너지 즉, 무언가로 이어지는 의사소통이라고만 해 두자! 그런 힘을 가진 존재를 편의상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리모트는 전통적인 기도를 세 덩어리로 나누고 도와주세요!(간구)/ 고맙습니다!(감사)/ 와!(찬양) 등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고백(회개)을 빼놓은 점은 놀랍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 성경이 제시한 놀라운 기도의 영역 중 아주 좁은 영역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성경은 기도의 기술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보여 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기도는 제한적으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며 엉뚱하게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면 마침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지어내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유진피터슨은 기도의 핵심은 제 입맛대로 신앙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있으며, 자기 표현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답하는 법을 체득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18세기 영국국교회 목회자였던 조지 휫필드는 대각성 운동기를 이끈 선두주자 가운데 하였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1743년 휫필드와 아내 엘라자베스 사이에서 첫째 사내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휫필드는 자기 아들을 보면서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이름을 따서 존이라고 불렀습니다. 휫필드는 교인들 앞에서 아들에게 세례를 부면서 하나님이 장차 아기를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생후 4개월에 접어든 어느 날, 아기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휫필드는 불쑥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 말씀에 버금갈 만큼 중요하게 여긴 처사가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휫필드는 자신의 느낌을 하나님이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기도문을 작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무지한 아버지를 더 신중하고, 더 침착하며, 사탄의 술책을 더 잘 꿰뚫어 보게 하셔서 주님의 소유인 교회를 섬기는데 더 요긴한 일꾼이 되게 해 주옵소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나 충동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걸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기도생활 점검>
말씀을 통해 기도하고 있는가? (평생기도문 VS 개인기도문)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양한 기도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가?
신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오해한 적은 없는가?
20190807(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제2부 기도를 분별하다 제5장 기도는 주문이 아니다
(부제: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간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라>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자신을 알기를 원하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시길 원하십니다. 티머시 워드는 “성경 말씀을 대하는 건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분을 만날 수 있는지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신학적인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화하게 되어 있으며, 기도할 때마다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모두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28장19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여기서 이름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하나의 실재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셋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십니다.
(골로새서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고린도전서8:4)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바울은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과 이름, 실재를 가지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님은 모두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알고 사랑하며 영원 전부터 함께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을 해 오신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내부적으로 언제나 완벽한 친교를 나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님은 서로 흠모하며, 사랑으로 찬미하며, 기쁨을 주고받습니다. 사랑받고 또 사랑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한정 갚고 큰 행복을 누리십니다. 오전한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감정과 사고를 초월하는 게 아니라 영광스러운 사랑과 기쁨이 차고 넘치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사랑과 행복을 알 수 있었다면 굳이 다른 존재들을 지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창조주께서 인간을 지으신 한 가지 이유는 우주적인 기쁨과 사랑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누시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거룩한 형상대로 지음 받은 덕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서로 대화하고, 알며, 교제하자고 하시는 까닭은 스스로 만끽하고 계신 큰 기쁨을 나누고 싶으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누리는 지극한 기쁨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누리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 죄에서 인류를 구하게 하셨으며, 그 덕에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될 길이 열렸습니다.(엡1:3-4)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1:12-13) 성령님은 하나님의 살아 숨 쉬는 생명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십니다. 거룩한 본성을 심으셔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십니다.
(갈4:4-6)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임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새 식구로 입양된다는 건 하루하루 일상적인 생활방식이 혁명적으로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공급받는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복음17: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로 입양해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 값을 치르셨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상급을 우리에게 돌리신 셈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아버지 품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곧 다가감을 말합니다. 언제나 귀 기울여 들어 주시고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만한 자격을 가졌거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생각하시며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친밀한 관계와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누리는 방법인 동시에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바울은 에베소서2장18절에서 그리스도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기도는 그저 믿음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방법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란 성령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변환된 믿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로마서에서 설명합니다.
(로마서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은 거룩한 자녀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감을 채워주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루에 두 시간씩 솔직하고 담대한 기도를 드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작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죄인들을 엄하게 심판해야 마땅하고 온당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주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주셔서 평안하게 하셨으며, 기꺼운 심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소리쳐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린아이처럼 믿는 감미롭고 상쾌한 재미를 만끽하게 하십니다.’
때로 성령님은 당장 구체적으로 무얼 구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뜻을 갈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사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간격은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더 나아가 우정을 쌓으며 교제하는 일이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궁극적인 중보자요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상이 되어주심으로 커다란 간격을 없애서 주님과 친구처럼 사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4:15-16인용)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며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창조주와 소통하는 외길임을 인정하고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하늘 아버지께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에,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시고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부르짖으며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를 포기한 덕분에 누구나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값입니다. 주님이 값을 치르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행한 가족사, 인간사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사랑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대로 된 부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편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지금 하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대가를 치른 까닭에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일으시킬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는 자연스레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혜택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의 기쁨과 사랑, 평화와 확신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가짐과 행동, 성품이 달라지게 됩니다.
20190821(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제3부 기도를 배우다 / 제6장 어거스틴과 루터, 기도를 말하다
부제 :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라
기도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대화를 계속 이어 가는 일입니다.
그동안 기도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제는 어떻게 기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지 교회사의 위대한 스승 3명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 장 칼뱅에게서 기도수업을 배우려고 합니다.
<성숙한 기도생활을 위한 어거스틴의 편지>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로마의 귀족 여성 아니키아에게 편지를 두 통 썼는데 특히 첫 번째 서신은 기도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니키아가 기도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어거스틴이 답장을 보낸 것입니다.
[제1원리] 어거스틴은 기도의 방법보다 어떤 인간이 되느냐가 기도의 첫 번째 원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놀라운 세상 부귀영화도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영원한 평화와 행복, 위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기도의 방향이 잘못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하는 것들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면 우리의 기도 또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가령, 부의 축적을 행복의 근원으로 본다면,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간구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걱정일 뿐, 기도가 끝나면 더욱 초라해지고 불안해질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어서 우리 마음을 치료해 주며 주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은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잡히면, 즉 내가 그리스도와 동떨어져 황폐해진 상태임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비로소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누구나 구하는 제목을 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지만 무엇이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까요? 어거스틴이 제안한 기도의 첫 번째 원리를 깨달았다면,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는 일시적인 기쁨을 줄 따름이며, 거기서 오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제2원리] 어거스틴은 시편27편4절을 인용하면서 기도의 두 번째 원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시편27편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것이 행복을 구하는 기본적인 기도이며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허상을 걷어 낸 심령만이 드릴 수 있는 간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우리 자신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어서 어거스틴은 우리가 필요한 것도 구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으뜸으로 사랑하며 그분을 알고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귀하게 여긴다면, 기도의 제목과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30장8-9절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어거스틴은 잠언30장8-9절의 기도를 좋은 본보기로 설명합니다. ‘주님! 직장을 주셔서 가난해지지 않게 해주세요.’ 이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라는 주기도문의 기도와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채 기도를 드린다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최대한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그러나 잠언30편 기도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주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고 풍요롭게 지내도록 도와주세요. 하지만 잘 관리할 만큼만 허락하셔서 하나님을 삶의 으뜸자리에 놓는 힘을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정말 필요한 것은 안락한 생활이나 지위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제3원리] 어거스틴이 말하는 기도의 세 번째 원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기도의 모범이 주기도문인 것을 어거스틴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에 맞추어서 자신의 간구를 하라고 권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욕심에서 아무개한테 그러신 것처럼 제게도 큰돈을 주세요라든지 이름을 날리게 해 주세요. 힘 있는 자리에 가고 세상에서 다 알아주는 인물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이가 있다면, 주기도문의 어느 한 부분과도 자신의 요청들을 연관시켜서 맞출 수 없다. 그런 제목을 두고 구하는 걸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제4원리] 네 번째 원리는 암흑기에 드리는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세가지 기도의 원리에 따라 기도하더라도 누구나 ‘힘겨운 시절을 만나면 무얼,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때’가 오게 됩니다.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는가? 고통을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는가? 어거스틴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네 번째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탄식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성령님이 대신 간구하시며 마음을 이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약속하는 로마서 8장26절을 이야기합니다.
삼십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아니키아는 로마가 약탈을 당하던 AD410년 손녀와 함께 아프리카로 피난을 갔다가 어거스틴을 만나게 됩니다. 여인의 삶은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가 그 덕분에 기도가 한결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편지의 말미에 어거스틴은 아니키아에게 묻습니다. ‘홀로되서 외롭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여인들에게 기도 사역이 더 적합한 이유는 무엇인가? 홀로 된 상태를 일종의 방패로 삼고 지속적이며 한없이 뜨거운 기도를 드리기 때문 아니겠는가?’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인들에게 고난은 제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환상과 고집불통의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풍요롭고 열정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안정 장치라고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은 아니키아에게 주어진 형편을 끌어안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아마도 아니키아는 어거스틴의 당부를 꼭 붙잡고 더욱 기도에 힘썼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제안하는 기도의 4가지 원리>
제1원리 기도하기 전에 나는 어떤 인간인지 확인해 보자!
여전히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인간인가?
삶의 우선순위가 언제나 주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인간인가?
제2원리 내가 가장 바라는 한 가지가 무엇인가 확인해 보자!
정말 하나님만 추구하면서 살아가는가? (시편27:4)
정말 잠언30장8-9절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제3원리 주기도문의 간구에 따라서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용서를 위하여
시험과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제4원리 영적 암흑기에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가?
겟세마네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의 처지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것을 믿고기도하는가?
20190828(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제6장 루터, 기도를 말하다
루터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였던 파이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적어도 세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특히 바쁘게 일해야 할 시간이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가 그의 기도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맙소사! 그의 기도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신실 하던지요! 하나님 앞에 서서 아뢰듯 지극히 경건하게 그리고 아버지나 친구와 대화하듯 소망을 품고 진실하게 간구했습니다.’
페터는 루터의 수염을 깎고 머리를 다듬어 주던 이발사였습니다. 연약한 신앙을 가진 그는 인간적으로 흠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사위에게 칼을 휘둘러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루터의 간절한 중재로 처형을 모면한 그는 죽는 날까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배를 떠나기 전 페터는 루터에게 간단하고 단순한 기도방법을 물었고, 루터는 그에게 한통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제1원리 규칙적인 훈련으로 기도를 몸에 배게 하라!!
하루에 두 번씩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자 잠들기 전에 어김없이 해야 할 마지막 일로 삼는 게 좋다. 조금만 있다가! 그럴싸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처럼 좋든 싫든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2원리 생각을 한데 모으고 기도를 향한 열정과 애정을 불태우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을 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간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님과의 친밀한 대화로 들어가는 좋은 방법은 ‘음송’을 하는 것이다. 십계명, 성경의 암송 구절들을 조용히 읊조리는 것으로 온 마음과 감정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법이다. 이런 훈련을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이끌려서 기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생기게 해야 한다.
제3원리 말씀 묵상을 통해 기도하라!!
성경의 명령을 네 부분으로 나누고 그 네 줄기를 얽어 화환을 만들어야 한다.
첫째는 명령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며 그 말씀의 가르침을 주신 참뜻이 무엇인지 살펴 하나님이 무얼 요구하시는지 진지하게 묵상한다. 둘째는 그 깨달음을 감사로 셋째는 죄의 고백으로 넷째는 간구로 연결시킨다.
먼저 말씀에서 가르침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변화시킬 진정한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뽑아내야 한다. (묵상의 교과서적인 측면) 가르침을 뽑아낸 다음에는 (의미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다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며 죄를 고백하고 거기에 이끌려 주께 간구에까지 나아간다.
<주기도문의 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 묵상 : 우리라는 단어를 묵상하면서, 신앙생활은 혼자 노력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다른 형제자매들과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일러주셨다.
2) 감사와 찬양 : 영적인 여정을 함께하며 도와주는 친구들을 주신 하나님, 공동체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연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린다.
3) 죄의 고백 :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주 기도하지 못한 점이나 한결같은 자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동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것을 고백한다.
4) 간구 :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도록 이끌어 주시길 기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묵상훈련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체 안에서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독특한 방식으로 이론적인 차원을 벗어나 묵상하는 진리가 실제로 자신의 삶의 안팎을 살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개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렇게 얻은 진리가 너무도 놀랍고 감동적이어서 당장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묵상하는 심령의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일상생활도 영향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십계명의 예>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섬지기 못한다.’
첫째, 부유함, 특권, 권력을 비롯해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토대나 신뢰의 대상을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가 어떤 값도 드린 적이 없지만, 우리를 한없이 긍휼히 여기셔서 자애로운 방식으로 찾아오셔서 내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보살피시며, 필요할 때마다 위로와 인도와 도움과 능력을 베풀어 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셋째, 무수히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러 두렵게도 주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걸 고백한다. 이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넷째, 마음을 지켜 주셔서 다시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짓밟는, 그러니까 다른 우상들을 따르거나 어떤 피조물에서 위안을 찾는 죄를 절대로 범치 않으며 온 마음을 다해 내 유일한 하나님께 진심으로 단단히 붙어 있도록 해 주시길 기도한다.
제4원리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무리 하라!!
주기도문의 장점은 기도를 가로막는 생각들이 흐트러지고 잡념이 끼어드는 현상을 해결해 준다.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훈련하면 정신세계를 철저하게 장악하여 하나님께만 온정신을 집중하도록 돕는다. 또한 주기도문은 우리의 기도에 불을 붙여 오랫동안 활활 타오르게 한다.
제5원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절대 놓치지 말라!!
주께 간구하는 내내 성령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말라!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하다가 선한 생각들이 샘솟는다면 다른 제목들은 잠시 미뤄두고 그런 생각이 마음에 깃들일 여지를 확보하라. 침묵 가운데 귀를 기울이고,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이 친히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수천 마디의 기도보다 성령님의 설교 한마디가 더 낫다. 성령님이 그러한 생각들을 통해 심중에 깨우침을 주는 풍성한 메시지를 주기 시작하시면 여기 적힌 다른 원칙들은 다 집어던지고 그분을 예배하라. 성령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기에 주목하면 주님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볼 것이다.
루터의 기도 원리를 정리하면, 깊이 묵상한 성경 말씀을 토대로 기도의 자리(묵상/감사/고백/간구)로 나아가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그 말씀에 화답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성령님이 설교하기 시작하시는지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때다 싶으면 통상적인 기도 방법에서 벗어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주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20190911(오후7:30) 한교회 수요기도회
팀 켈러 기도 : 제7장 칼뱅, 기도의 원칙을 논하다
독일의 루터와 쌍벽을 이루는 스위스(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뱅의 주요 저작인 ‘기독교강요’에는 기도의 원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로교는 누구의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고 있을까요?)
첫 번째 기도 원칙은 ‘경외(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기도란 온 우주의 창조자와 통치자인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 없이 기도하는 일은 가장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엄에 이끌려 세속적인 염려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칼뱅이 말하는 두려움은 제대로 살지 않으면 영적으로 버림을 받을까에 대한 두려움, 즉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평소에 존경하던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고 해 봅시다. 서로 악수를 하고 대화를 나눌 때 때로는 당황해서 몸이 떨리고 진땀이 나게 될 것입니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식사를 한다면?) 존경하는 대상에게 실수할까봐 염려하고 겁을 내는 것입니다.
징벌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중심적인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받아들인, 즉 아무 자격도 없지만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행복한 두려움이 가면 갈수록 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거룩한 임재 가운데 머무는 특권에 가슴이 떨리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차오르게 됩니다.
칼뱅은 이 경외감이야말로 기도의 핵심부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겸손은 기도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에 감동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주기도문 앞부분, 아버지, 거룩, 나라, 뜻)
두 번째 기도 원칙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의식은 허구를 몰아냅니다.’ 영적인 겸손에 해당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입니다. 칼뱅은 자신의 경건함을 내보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는 방법을 완강하게 거부합니다.(중세시대, 면죄부)
열매 맺는 기도를 드리려면 스스로의 허물과 연약함에 무자비하리만치 정직해야 합니다.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는 ‘허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회의와 두려움, 허무 따위를 솔직히 인정하며 그분 앞에 나와야 합니다. (거지 기도)
프랜시스 스퍼포드는 인간의 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할, 도저히 어우러지지 않는 욕구들을 가진 존재이다. 부조화하게 뒤섞인, 그래서 간절히 소유하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지 않는 식의 욕망을 내면 깊은 곳에 지녔다. 비극적인 결말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 그렇게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것이 인간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성경이 죄라고 부르는 내면의 총체적인 혼돈을 알아채기 전까지 칼뱅은 ‘허구/허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진정 인간을 파멸시키는 ‘결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고백과 회개는 진실한 기도에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겸손은 기도하게 만드는 요인이니 동시에 열매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데려갑니다. 인간의 결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결함과 결핍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은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며 쥠의 용서와 도우심을 더 간절히 사모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자기 합리화나 남 탓, 자기 연민, 영적인 교만 따위를 버리기를 요구하고 또 그럴 힘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들의 특징은?)
세 번째 기도 원칙은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이는 누구든지 자기 영광을 생각하는 마음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 또한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하게 이끄는 것도 기도의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도는 모든 필요와 소원을 주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때에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놀라운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됩니다.
네 번째 기도 원칙은 ‘확신과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입니다.
칼뱅은 반드시 응답 받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와 넷째 원칙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옳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열심과 확신을 품고 기도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칼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간구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또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종종 자녀들이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 까닭은? 따로 구하지 않고 선한 것들을 받으면, 내심 스스로 잘나서 얻은 열매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지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심평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제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더해 과신을 갖게 하고 마침내는 실패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약4:2)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끝낸 뒤에야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선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끊임없이 채워 주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다면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도깨비 방망이, 요술 램프 등의 얘기가 사방에 넘치는 걸 보면, 인간의 욕구를 조화롭게 처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명하지도 않아서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뜻에 어긋나는 일을 허락지 않으시며, 자녀들의 소망을 무조건 충족시켜 주시는 게 아니므로 자신 있게 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청을 드리게 될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그 결과를 조절하십니다.
다섯 번째 기도 원칙은 ‘은혜의 원칙’입니다.
한 점 흠 없이 올바르게 기도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누구도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뱅은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기도의 근거가 되고 토대가 됩니다.
기도는 은혜로, 은혜를 따라 빚어져야 합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선물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얻었기에 두려움과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달을 때 기도를 온전히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기도의 원칙은 기도 응답을 보장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스위치는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전구를 동력원과 연결시켜 주는 장치일 뿐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요술 주문이 아닙니다. 자기 능력이나 경력에 의존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고 용납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의 설교가 토리가 예배 전에 쪽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25년째 주일학교 교장을 맡고 있고 장로가 된지 20년이 넘었지만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교시간에 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발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권한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한 행실에 기댈 게 아니라 주님의 청구원에 의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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