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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에 대해서
박준원 2025-03-25 추천 0 댓글 0 조회 8

<신학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라스


<미르체아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

엘리아데는(루마니아, 197-1986) 체계적인 종교 연구로 종교 문화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신화와 신비 체험의 역할을 깊이 다루었다. 통과의례에(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구별짓는 예식들 탄생, 성인식, 죽음 등) 의한 그의 분석은 인류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원회귀의 신화1949, 성과 속1959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이 '성스러운 것'의 개념이다. 성스러운 것이 의미와 가치, 힘 존재의 원천이라고 본다. 성스러운 것은 큰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엘리아데의 이 개념은 루돌프 오토(독일, 1869-1937)는 거룩한 것의 경험은 신비로운 것이며,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개념과 아주 유사하다.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관점에서 논한 '성스러운' 것과도 유사하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것이 실재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성스러운 것은 인간 의식의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현상적 실체(나무 등)는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이 적절한 준비만 되어 있다면 신성현현(성스러운 것의 계시)으로 파악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나무지만 그 나무를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신성한 것의 계시가 될 수 있다. (경험에 의해 결정) 신성한 것이 일정 부분 사회적 산물이요, 보편적이고 개관적인 관념이 아니라 경험자의 역사에 의해 규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엘리아데가 '신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신화'는 진리와 실재의 문제를 다루는 특별한 유형의 이야기로서, 삶의 심오한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역사적 실재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훨씬 능가한다.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임과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인 <그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간접적으로 답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진리를 지니고 있는 신화는 신성현현, 곧 성스러운 계시가 될 수 있다. 신화는 성스러운 역사를 말해준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신화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성스러운 것은 인간 본성의 보편적 특성이며, 종교는 이것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구체화한다. 그는, 우리는 성스러운 것을 제거하나 합리적으로 해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밝혀주고 인간의 깊은 열망에 빛을 비추어 주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 인간의 고안물인 종교>

이 이론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관계가 있다. 이 이론은 종교를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요, 하나님에 맞서는 도전행위로 본다. 여기서는 종교를 인간의 편에서 위를 향해 하나님을 찾는 일로 이해한다. 종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완전히 대립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종교가 인간의 조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바르트는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신학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문화 개신교는 인간의 종교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바르트는 1916<하나님의 의>라는 강연에서 인간의 종교성을 바벨탑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인간이 세운 구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신앙'에 이르고 하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탐구는 '종교'를 낳는 것으로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바르트는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계열에 속한 종교 비판을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비판들이 인간의 고안물인 종교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한 할 장애물이 종교다. 최악의 경우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고안물을 예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상숭배가 된다.

사람들은 바르트의 종교관을 종교의 철폐라고 정의한다. <교회 교의학> 1217항 표제에 대한 표준 번역이 '종교 철폐로서의 하나님 계시이다. 이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신중한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어 철폐 Aufhubung는 독일 철학 전통에서 헤겔주의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이다. 이 말의 기본의미는 제거하다, 지양하다는 두 의미이다.

바르트 초기 저술에서는 종교를 인간의 고안물로 보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여기서 바르트가 하려고 한 일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들을 세우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타종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종교 일반을 비판하였다. 바르트는 기독교 안에서도 종교 현상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사회 문화의 가치들이 복음 속에 침투하여 복음과 혼합된다. 이러한 것을 우려한 바르트의 태도는 1930년대 독일 교회의 투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독일의 이념들이 기독교 신앙과 혼합되었다고 보았다. 후기에 바르트의 태도는 부드러워졌다. 점차 종교의 필요성을 현세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게되었다. 점차 종교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 예배의 형식들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갔다.

바르트는 종교가 신앙에 필요한 버팀목으로 세상이 끝날때까지 존속할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은총을 수단으로 이 종교를 초월하고 능가한다는 점이다. 종교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말한 종교의 철폐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말이 안된다. 이 말은 종교의 변형이나 승화로 번역해야 한다. 인간의 고안물로 여겨지고 하나님의 계시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종교는 분명 비판이 필요하지만 유용한 역할이 있다.

이러한 견해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디트리히 본회퍼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본회퍼가 현대 신학에 기여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할 현대 세계의 문화 상황을 분석한 일이다. 1943.4.5, 본회퍼는 아돌프 히틀러의 저항한 음모에 가담한 죄목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베를린의 테겔 형무소에서 18개월을 보내는 동안 그 유명한 <옥중 서간>을 섰다. 이 책에서 그는 성년에 이른 세상,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문제를 성찰하였다. 그는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열렬히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많은 오해를 받았다.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에서 그 오해를 볼 수 있다. 본회퍼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종교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기독교 형태였다. 본회퍼는 새로운 무신적 상황에서 볼 때 이런 가정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종교성 없는 기독교란, 인간이 천성적인 종교성이라는 사리에 맞지 않고 신뢰할 수 없는 개념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신앙을 말한다. 문화, 형이상학, 종교를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와 상당히 유사하다.)

본회퍼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현대 세계에 적합한 하나님 모델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 하나님은 세상에서 쫓겨나 십자자에게까지 밀려나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다. 본회퍼의 이러한 개념은 전후 독일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받았으면 1960년대 미국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도 혼동이 따랐다. 급진적 저술가들은 본회퍼의 종교성 없는 기독교, 바르트의 종교 철폐라는 말을 완전한 종말, 전통적 기독교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오해는 신에게 솔직히, 신죽음 운동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위일체론적 종교신학>

신학적으로 발전한 삼위일체론이 타종교의 신학에까지도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라이문도 파니카의 <삼위일체와 인간의 종교경험1973>에서 삼위일체의 틀이 인간의 영성 및 종교경험과 종교적 표현의 복잡한 본질을 헤아릴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였다. 1991년 니니안 스마트와 스티븐 콘스탄틴에 의해 더 발전하였다. 공저 <세계적 맥락에서 본 기독교 조직신학>에서 사회적 삼위일체 개념은 인간의 모든 종교경험의 바탕을 이루는 궁극적인 신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인간 영성의 여러 형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를 경험한 데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6년 자크 뒤피는 <종교 다원주의의 기독교 신학을 향하여>에서 이와 다른 제안을 하였다. 인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예수회 신학자 뒤피는 삼위일체 교리가 다른 종교 전통들이 증언하는 절대적 실재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서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뒤피의 성찰은 칼 라너가 제시한 사고체계를 더 깊이 발전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적 실재를 자기네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비록 익명으로 숨겨져 있긴 해도, 신적인 삼위일체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참된 종교 체험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기독교 계시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고 일하신다.'

2000년 가빈 드코스타는 <종교들의 만남과 삼위일체>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는 방법의 효율성을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기독교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라는 점을 신중하게 강조하면서도 성령의 보편적인 임재 안에서 다른 종교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이 타종교인과 교류하면서 하나님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성령의 보편적 임재와 사역으로 인해 타종교인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타종교 이른들이 지느는 의미는 바르트식의 종교 비판을 따르지 않고 삼위일체론적인 틀 안에서 타종교와 그들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종말론에 대해서>

18장 마지막 일들, 기독교의 희망


20세기에 널리 사용된 종말론이라는 용어는 '마지막 일들'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으며, 부활과 심판처럼 기독교인들이 장차 소망하는 일들을 다룬다.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앞에서 다루었던 다음 논의들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신학적 함의에 관한 논쟁

- 19세기 말에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종말론적 측면을 재발견하는 일

- 기독교 구원론의 종말론적 차원


종말론은 넓은 의미에서 '마지막에 관한 담론'을 뜻한다. 

마지막이란 개인의 죽음 또는 현시대의 종결을 가리킬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간을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종말론은 삶과 역사의 마지막과 관련된 믿음의 체계를 다룬다. 

근래에는(1980년대) 종말론적과 묵시적이라는 용어를 구분하였다. 

종말론은 죽은 자의 부활, 천국, 지옥 같은 마지막 일들과 관련된 기독교 신학의 분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묵시적이라는 말은 마지막 일들과 그러한 관심사에만 규정되지 않는 문학 장르나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묵시적이라는 말은(폭로, 드러냄, 계시) 예수가 태어나기 200년 전부터 태어난 후 200년까지 유대교 집단 내에서 등장한 특별한 문헌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유대적 묵시문헌은 하나님이 세상일에 곧 개입할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이 개입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고 원수들은 멸망하며, 세상의 현 질서는 뒤집혀 구속된 창조세계로 대체될 것이다. 

묵시문헌에는 환상과 꿈의 역할이 강조된다. 환상과 꿈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게 되는 통로였다. 묵시적이라는 문학양식, 저술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의 발전>

종말론에 대한 신학성경의 근거와 최근 신학에서 나타난 여러 해석을 살펴보자. 


1)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구성하는 중요한 자료이기에 신약성경의 중심 주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료는 예수의 설교와 바울의 저작들이다. 

예수의 설교에서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은 유대교 저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공관복음서(70번 사용) 나라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왕권, 통치의 대상이 되는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통치 행위 자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를 주로 사용)


예수의 설교에서 이 용어(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온 것이면서 그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진다. 주기도문에서 그 나라가 미래에 오게 된다고 말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포도주를 마시게 될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였다. 겨자씨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 지금과 아직 아니는 긴장상태를 이룬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시작되었고 미래에 완성된다는 점을 가리키는 말이 '시작된 종말론'이다. 


바울의 종말론 역시 지금과 아직 아니의 긴장에 대해 말한다. 

-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로운 때,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강조한다. 새 시대는(새로운 피조물)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실현된 종말론에서는 장차 올 시대의 모든 일들이 이미 현재에 완성되었다고 본다.(고린도전서) 이에 대해 바울은 세상의 궁극적인 변화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확신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새 시대'가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확증해 주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로 하여금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지식을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사건으로 보았다. 

- 바울은 마지막 말, 심판이 이루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을 기대하며, 신자들이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새로운 삶에 이르게 될 것을 확증한다. 바울은 주의 날, 마라타나,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강림과 최후의 심판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 바울 종말론의 중심 주제는 성령의 오심이다. 성경의 선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가 밝았음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성령의 성물을 아라본(보증, 맹세)로 해석하였다. 신자들이 현재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궁극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지금 여기서 그 미래 사건에(장차 완성될 구원) 대한 확신을 지니게 된다.


신약성경은 새 일은 미래에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지금과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이 긴장에 대한 문제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주제이며 계속 다룰 내용이다. 


2. 죽은 후의 재결합, 로마와 초기 기독교의 믿음

죽음 이후 가족의 재결합에 대한 고전적 장면(뱃사공 카론이 실어다주면 가족과 재결합, 스키피오의 꿈 등)이 기독교 저술의 형식과 소개에 영향을 주었다. 258년에 순교한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박해로 죽음에 직면했던 기독교인들에게 천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곳에서 순교자와 사도들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천국은 본향이며, 그곳을 떠나 살아온 삶이 이 땅 위의 인생이다. 본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결합한다는 소망은 큰 위로를 주었다. 


 이러한 주제는 395년에 사망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기리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의 추도문에도 발견된다. 천국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내 프라킬라와 딸 풀케리아를 껴안고 있으며 자기 아버지와 그의 전임자인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재결합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 두 도시

<하나님의 도성>은 대도시 로마가 파괴되고 로마제국이 멸망해 가던 묵시적 상황에서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의 도시와 세속 도시의 관계를 주심 주제로 다룬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시대에 산다. 교회는 세상 도시 안에서 나그네 상태로 살아간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세상 안에서 나그네로 신앙을 지켜가야 하는 교회의 현실과 이 세상에서 해방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미래의 희망 사이에는 강력한 종말론적 긴장이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에는 타락한 세사으이 모습이 섞여 있다. 순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성도와 죄인이 공존한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긴장은 해소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종말과 더불어 희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신자들은 구원받아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사실이 아니라 소망으로 주어진다. 구원은 신자들의 삶 속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역사의 마지막에 이러서야 완성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들의 삶의 악한 본성을 꿰뚫어보면서 그러한 현실이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복음의 명령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는지 염려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확고하고도 분명한 희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끝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하나는 존재했던 것이 존재하기르 ㄹ머추는 것이거나 또는 시작되었던 것이 완성됨을 뜻할 수 있다. 영원한 삶이란,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마침내 그 사랑의 대상과 연합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러 완성된다. 또한 완전에 이르게하는 상급이다. 


<피오레의 요아킴, 세 시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시대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가르는 시기가 된다. 이 구분에 대한 불만을 가진 해석자 중 하나인 피오레의 요아킴은 더 사변적인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좀 더 종말론적이고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요아킴은 코라소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면, 1177년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국 실라 산지에다 그 자신의 종교 단체를 세웠다. 

요아킴은 세계사를 세 시대로 구분한다. 

(1) 성부의 시대

구약성경의 시대이다. 결혼한 평신도 계급과 연관을 지으며, 율법 아래에서 살았다. 

(2) 성자의 시대

교회까지 포함한 신약성경 시대이다. 성직자 계급과 관련 짓는다.

(3) 성령의 시대

새로운 종교 운동들이 일어나 교회이 갱신과 개혁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이 세상에 평화와 일치가 성취된다. 수도사 계급과 연관짓는다. 

요아킴은 이 시대들의 정확한 날짜를 정하는 것이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42세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성직자의 시대는 1260년에 끝나게 되고 성령의 시대가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에서 현대에 나타난 천년왕국 운동의 많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이론은 당시 1260년이 가까워지면서 큰 소동을 일으켜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대해 교회가 염려하게 되었다.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는 그의 견해를 정죄했으며 아퀴나스는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요아킴이 말한 성령시대를 불과 5년 앞둔 1255년 교황청의 신학위원회는 그의 예언이 완전히 오류라고 견책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호감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제도적 특성을 강조한 교회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은 성령시대와 기존 교회를 대신할 영적인 교회의 도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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