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라스)
<예정론>
0)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한 것처럼 은총은 선물이다. 이와 같은 은총론 이후 곧바로 예정론으로 이어졌다. 예정론은 가낭 난해한 신학분야이다. 먼저 은총과 예정론이 어떻게 연계되었는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살펴보자.
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은총은 보상이 아니라 선물이다. 은총이 보상이라면 인간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장점도 많았지만, 특히 펠라기우스와의 지나친 논쟁으로 어두운 측면, 부정적 개념들도 발견할 수 있다. (*예정론에 대한 논리적 모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아량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지 않고 특별한 것이다. 오직 일부에게만 은총이 주어진다.(은총의 특수성 강조)
이러한 은총론의 개념으로 죄론을 설명해보자. 모든 인간은 죄로 더러워졌으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은총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은총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다. 그 결과 일부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예정이란 이처럼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수단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 사용한 예정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고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지 않기로 정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후계자와 동시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사람들을 저주로 예정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하나님 편에서 숙고하여 내린 구속의 결정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누구를 구속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구속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예정론은 9세기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베네딕트회 수도사 고데스칼크(808-867)는 칼뱅이 주장과 비슷한 이중 예정론을 펼쳤다.
그리스도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죽었다고 제안하였다. 9세기 저술가들은 이 견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응하였다.
<가톨릭의 논쟁들: 토마스주의, 물리니즘, 얀센주의>
중세시대 이후에 예정론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들은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명료하게 밝혀내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정이란 인간의 반응이나 도덕적 상태를 하나님께서 예지하셔서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중요한 것은 예정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한 삶에 이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이 구원을 향하도록 지도하신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영원한 삶으로 이끌리는 이유를 가리켜 예정이라 부른다.)
중세 이후, 더 급진적 견해를 주장한 사상가들이 있다.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1300-1358)는 이중 예정론을 펼치면서 하나님은 선택된 사람과 버림받을 사람을 미리 결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당시 저술가들은 이 교리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17세기에 와서 새로운 논쟁이 점화되었다. 예수회 신학자 루이스 데몰리나(몰리니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서 인간이 특정한 자원을 제공받을 때 어떻게 자유롭게 행동할지를 아신다. 따라서 예정이란 개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을 하나님이 조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베드로의 경우, 몰리니즘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은총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앞서 예지하시고 그에 맞춰 세상을 창조하기로 선택하셨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모두 지켜내신다.
이러한 사상에 대응하여 얀센주의자들이 터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코르넬리우스 얀세니우스(1585-1638)는 그의 유작 <아우구스티누스1640>에서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유효한 은총 개념을 강조하였다. 예정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과 결과이며, 그로 인해 인간의 일부만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 이 견해가 칼뱅주의와 동일한 것이라는 비판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개신교 논쟁: 칼뱅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장 칼뱅을 흔히 예정론을 신학체계의 중심으로 삼은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의 기독교강요를 보면, 이런 주장에 대한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예정론을 아주 신중하게 다루며 단지 4장만 할애하고 있다.
칼뱅의 예정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 하나님 자신이 각 사람에게 일어나기 원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조건으로 창조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이르도록 정하였다.
예정에 관한 그의 분석은 관찰 가능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복음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예정론의 일차적 기능은 어떤 사람은 복음에 응답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칼뱅의 예정이론은 인간의 경험을 성서에 비추어 해석하고 성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정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조항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예정은 칼뱅에게 핵심적 전제가 아니며, 은총의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마주치는 목회적인 난점을 설명하고자 고안된 부수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칼뱅 추종자들이 예정론을 개조하고 발전시키면서 신학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칼뱅 사후, 칼뱅주의 안에서 강조된 예정론, 곧 칼뱅주의 5대 강령을 살펴보자.
칼뱅주의 5대 강령이란 도르트 종교회의(1618-1619)에서 확정된 개혁주의 구원론의 다섯가지 원리를 요약한 것이다. (이것을 TULIP 으로 표기한다. 이 표현에 알맞게 네덜란드에서 회의 열렸다.)
(1) Total depravity 전적타락, 죄에 물든 인간 본성을 말한다.
(2) Uncondit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인간은 어떤 예견된 공로나 특성, 업적을 근거로 예정되지 않는다.
(3)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죄, 그리스도는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데스칼크의 주장)
(4)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선택된 사람들은 반드시 부름을 받고 구속을 얻게 된다.
(5) Perser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은 그 부르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 견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현되었다.
-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인류 가운데 일부를 생명으로 예정하셨다.
- 그 외의 나머지 인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 자기들의 죄로 인한 수치와 형벌에 떨어지도록 정하셨다.
17세기 초 칼뱅주의 진영에서 선택의 작정의 논리적 순서에 대한 중요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관념적 논쟁에서 두 가지 고전적 견해를 볼 수 있다.
1) 타락 후 선택설 (프랑수아 투레티니 1623-1687)
선택이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선택의 작정은 타락한 무리인 인간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지옥의 형벌로 예정한 것은 타락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결정은 타락한 인류를 대상으로 내린 것이다.
2) 타락 전 선택설 (테오도르 베자 1519-1605)
선택이 타락 이전에 일어났다고 본다. 하나님은 타락 이전의 인간을 대상으로 예정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타락은 선택의 결정을 성취하는 수단이라고 여겨진다.
3) 조건적 보편구원론 (모세 아미로 1596-1664, 칼뱅주의 학교) 미미한 영향력
칼뱅주의 5대 강령을 비판한 중요한 견해를 아르미니우스주의 운동이다.
개혁주의의 특정한 구속이론에 반대했던 네덜란드 저술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의 이름에서 왔다.
그는 그리스도가 선택된 사람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진영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1610 항의서가 출간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과 범위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했다.
- 하나님은 타락하고 죄에 물든 인류 가운데서 은총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신앙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을 택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로 결정하셨다.
-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 결과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화해와 죄 용서를 이루셨다.
- 그러나 그 일은 실제로 신실한 사람들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정의 개념은 유지되면서도 그 근거가 되는 뼈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도르트 종교회의는 예정을 개인적인 문제로 보아, 하나님이 특정한 개인들은 구원으로 예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로 예정했다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을 집단적인 것으로 이해해, 하나님은 특정 집단의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예정했다고 주장하였다. 믿음으로 개인은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정한 그 집단에(교회?) 들어가게 되며, 그렇게 해서 예정된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게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8세기 복음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지 윗필트1714-1770(칼뱅주의), 찰스 웨슬리1707-1788(감리교) 등이 주장하였다.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 <예수가 죄인들을 모든 체하실까>에서 인간의 보편적 구속 교리를 말하고 있다.
-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죄인들 풀어주소서
- 타락한 모든 영혼들로 나를 품으신 그 은총 맛보게 하소서
이 견해는 18세기 북미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모순과 약점을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널리 인기를 얻었던 이론이었다.
<칼바르트>
칼 바르트1886-1968 그의 사상 전반을 가르켜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과 관련)
그는 전통적 용어는 받아들이지만 자기 신학 맥락안에서 그 용어들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교회 교의학>에서 바르트는 두가지 핵심 주장을 근거로 예정에 관하여 논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 받은 인간이다.
그는 예정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분석한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택이라는 개념은 선택하는 이와 선택받은 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정한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친구이자 협력자가 되기로 선택하셨다.
바르트는 인간이 타락한 죄인임에도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신다고 주장한다.
2) 하나님은 이렇게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속자로 내어주시기로 선택하셨다. 이 일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수난, 죽음,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
3) 하나님은 구속에 따르는 고통과 대가를 완전히 감당하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골고다의 십자가를 왕의 보좌로 삼기로 정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자기 비하와 낮아짐의 길을 택하셨다.
4) 하나님은 그의 심판의 부정적 측면들을 우리에게서 제하여주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버리셨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인 버림받음과 영원한 형벌과 죽음을 자신이 친히 담당하기로 정하셨다.
이제부터는 버림받음이 인간의 운명이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감당해야 할 것을 받았으며, 그 결과 인간은 그 일을 다시 짊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정에 부정이 포함된다고 해도, 인간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예정에 거부와 버림이 수반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거부와 버림받음은 아니다. 예정의 결국이 파멸과 죽임이라고 해도, 인간의 파멸과 죽음은 아니다.]
바르트는 인간이 영원한 형벌로 예정되었다는 개념을 완전히 폐기한다. 영원한 형벌로 예정된 사람은 영원부터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기로 정해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지 않는다. 결국 은총이 불신앙까지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바르트의 은총론은 인간이 버림받을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다.
바르트의 예정론은 그가 강조하는 은총의 승리와 함께 보면, 인간의 보편적 회복과 구원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사상 전반에 공감했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 예정론에 대해 크게 비판을 받게 되었다.
에밀 브루너1889-1966가 바르트의 예정론을 설명하는 의견을 들어보자.
[실제로 버림받은 사람은 예수뿐이다라는 말이 인간의 상황과 관련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형벌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인간을 위해 이루어졌다. 인간이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요동치는 바다에 빠져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같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빠진 곳은 몸 하나도 채 뒤덮지 못하는 얕은 물가다.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무슨 말인고!!
<예정과 경제학: 베버의 논제>
칼뱅주의에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확신의 문제, 곧 어떻게 신자들은 자기가 선택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였다. 칼뱅은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행위가 확신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행위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다스린다는 증거로 생각되었다.
[착한 행위의 은총은 양자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졌음을 입증한다.]
이렇게 행위를 선택의 증거로 여기는 목회적 특성이 노동윤리를 형성하는 첫 단계가 되었다.
이 선택의 문제에 대한 불안감은 칼뱅주의 영성의 끈질기고 두드러진 특징이며 설교자와 저술가들이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한 기본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착한 행동을 실천하는 신자는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실천적 삼단논법이라고 한다.
1) 선택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 선택의 결과로 분명한 표지를 지닌다.
2) 그런데 나는 그러한 표지가 있다.
3) 따라서 나는 선택받은 사람에 속한다.
그러한 표지들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서 노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일이었다.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1864-1920 이러한 심리적 압박이 칼뱅주의 사회들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 바탕이라고 보았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결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지지할 수 없으며 또한 베버가 실제로 말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정신이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것이라는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논제를 주장할 생각이 없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자본주의식 기업체들이 존재해 왔다.]
베버는 16세기에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로 다룰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형식의 자본주의이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데 심리적 전제조건을 프로테스탄티즘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칼뱅주의가 그 믿음 체계를 바탕으로 심리적인 추동력을 불러일으킨 것이 근본적인 공헌이라고 보았다.
그는 소명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면서 칼뱅주의의 예정개념과 소명을 연결시켰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칼뱅주의자들은 구원의 결말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이 세상에서 성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성공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의 논제를 신뢰할 수 없는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종교사상이 경제와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베버가 밝혀낸 점만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예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도 역사에 매우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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