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154페이지입니다.
<종교개혁시대의 주요한 신학적 업적>
종교개혁은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운동이었습니다. 16-17세기에 걸쳐 기독교 신학의 자료들과 관련한 문제와 그것과 연관된 교리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 신학의 자료들
종교개혁의 주류는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일 아니라 기존 전통을 갱신하고 교정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학이 성서에 근거한다고 보았던 루터와 칼뱅 같은 신학자들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구호는 개혁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으며 신학에서 필요한 자료는 성경뿐이라는 신념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새롭게 강조한 일은 여러 결과들을 낳았습니다.
1) 성서에 근거한 것으로 입증할 수 없는 믿음은 거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무흠수태교리는 성경적 보증이 없기 떄문에 종교개혁자들은 폐기해버렸습니다.
2) 성서의 공적 위상이 새롭게 강조되었습니다. 주해설교, 성경주석, 성서신학 저술들이 종교개혁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반면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성서와 전통이 동일한 비중을 지닌 것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성서는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벨라르미노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성서를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개인적 방식으로 해석하여 교회의 질서와 교리에 파괴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 은총론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의 개인적인 의제가 종교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교회가 펠라기우스 주의에 빠졌다고 보았던 루터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는 서유럽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계가 있으며 칼뱅은 이 교리를 지지하면서도 후기개혁주의 신학에 더 중요한 견해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즉, 칭의론이 아니라 예정론과 연관지어서 은총을 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기본명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셨다는 사실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이해야할 문제로 보았다. 이러한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는 공로와는 상관없이 허락된 은총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견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 기독교인의 삶에서 선한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고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것은 <의롭게 되는것>이었는데 프로테스탄트들이 그것을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성례론전
1520년대에 종교개혁 진영 내에서 성례전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의 외적 표징으로 보는 견해가 체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칭의교리와 성례전을 연계한 일은 성례전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후 성례론전은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례전의 수와 본질 문제를 놓고 다투었고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찬식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느냐의 문제로 격렬하게 다투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례전의 수와 본질에 대해 전통적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화체설>을 강력하게 옹호하였습니다.
4. 교회론
1세대 종교개혁자들이 은총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2세대들은 교회의 문제를 놓고 논쟁하였습니다. 루터는 주로 은총 교리를 깊이 다루었던 데 반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론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마틴 부처(1491-1551)와 장 칼뱅이었습니다.
이러한 발전에 대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회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개신교도들이 스스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정하고 세우신 사회로, 그 울타리 밖에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종교개혁 시대의 문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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