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어서)
오르비에토의 위골리노(?-1373) 같은 비평가들은 이교 철학자의 개념과 방법에 크게 의존한 결과 기독교의 핵심적인 통찰들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칭의 교리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 정의 개념에 비추어 논의되었고 의로움은 어떤 사람에게 그가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정의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공로에 의한 칭의 교리를 낳은 것으로 보입니다. 은총이 아니라 권리를 근거로 칭의가 이루진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싫어하게 되고 결국 스콜라주의의 칭의교리에서 갈라선 배경이 여기에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3) 신학 체계의 발전
스콜라주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의 조직화에 대한 욕구는 복잡한 신학체계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신학체계를 역사학자 에티엔 질송은 정신의 대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대표적인 저술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입니다. 이 책은 신학의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면모를 가장 잘 담아낸 작품입니다.
4) 성례전 신학의 발전
초대교회는 성례전이라는 용어정의와 포함되는 내용에 대해 거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세례와 성만찬만 성례전에 속한다는 데만 의견이 일치했을 뿐입니다. 중세에 들어와 신학이 부흥하게 되고 점차 교회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공적 예배에 대한 기반과 예배의 이론적 측면들을 통합하라는 압력이 교회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성례전 신학이 발전하였으며 성례전의 정의와 세부적인 모습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5) 은총 신학의 발전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총의 신학'이었습니다. 단편적인 그의 신학을 중세 신학자들은 통합하고 체계화 시키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은총과 칭의의 교리들이 놀랍게 발전하였으며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이 핵심의 정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질 터전이 마련되었습니다.
6) 구원 과정 속의 마리아의 역할
은총과 칭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가 구원에서 맡는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특별히 둔스 스코투스는 이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론을 전에 비해 훨씬 확고한 기초 위에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도 원죄가 있다는 유흠론자들과 원죄가 없다는 무흥론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덧붙여 마리아를 공동구속자로 볼 수 잇느냐를 두고도 커다란 논쟁이 있었습니다.
7) 기독교 신학 원전으로의 회귀
인문주의 핵심 요소는 서유럽 문화의 원천인 고대 로마와 아테네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에서는 신학의 기초 자료들,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의 자료들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해 성경이 신학의 자료로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라틴어로 옮긴 기존 성경번역본들이 부적합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불가타 성서는 중세기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던 라틴어역 성서였습니다. 특히 불가타 성서의 개정이 진행되면서 신학적 수정도 불가피해졌습니다.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잘못 번역한 라틴어 번역판을 기초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문주의는 성경 번역본이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으며, 그에 따라 이 번역본을 근거로 삼은 일부 신학적 관념들도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인문주의 학자들이 성서 번역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하자 중세에 발전한 이부 신학 이론들을 떠받쳐 온 성서적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발전 중의 하나였습니다.
8) 불가타 성서에 대한 비판
인문주의는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이 표어가 교회에 적용됨으로써, 기독교 고유 문헌인 교부 저술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원어로 쓰여진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본문을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16년에 에라스무스에 의해 최초로 인쇄된 그리스도어 신약성경이 출판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출판본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필사본 전부를 구하지 못해 빠진 부분은 그리 문제 많던 라틴어 불가타 성서를 다시 그리스어로 번역해 보충하는 모순이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이 성서는 문학적 작품으로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신학자들은 그리스어 신약원본과 라틴어 불가타 성서의 본문을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밝힌 번역상의 오류 두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에게 크게 환영할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 불가타 성서는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 마태복음 4:17을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로 옮겼습니다. 이러한 번역의 오류로 인해 천국의 도래가 고해성사와 직접 연결된다는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로 번역해야 함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중세 교회의 성례전 체계를 정당화 해 주던 중요한 근거가 도전받게 되었습니다.
(2) 누가복음 1:28 불가타역에 따르면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가 가득한>사람이라고 번역함으로 마리아가 은혜가 가득한 창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은혜를 입은 혹은 받은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함으로 마리아는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세 신학의 중요한 업적을 떠받치던 성서적 기반이 인문주의 신약 성경 연구로 말미암아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불가타 역본의 신빙성이 무너졌으며, 올바른 성서 본문을 기초로 신학을 개정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또 신학과 관련해서도 성서 학문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신학은 잘못된 번역을 근거로 해서 결코 온전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1520년대부터 신학에서 성서학 연구가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종교개혁과도 연결이 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종교개혁을 살펴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근대 서구 기독교의 독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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