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9일 저녁 독일 라이프치히 소재 토마스교회(Thomaskirche)에서 열린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 공연. 국내에서 예매한 표를 가지고 아들·며느리와 함께 2층 남쪽 좌석에 앉았다.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념하는 수난절. 마태수난곡(바흐작품번호 BWV 244)은 종교음악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음악을 통틀어 첫손에 꼽힌다는 대작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 S Bach)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고 1729년(1727년이란 주장도 있음) 4월 15일 처음 연주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그것도 바로 수난절에 감상하다니 감격도 이런 감격이 없었다.
총 68곡(예전 기준으론 78곡인데, 분류 기준만 다를 뿐 전체 분량은 변화 없음)을 지루할 틈도 없이 3시간에 걸쳐 감상했다. 마태수난곡은 2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필요한 대곡이다. 복잡한 다성(多聲) 합창, 예배 시간에 흔히 듣는 간결하고 친숙한 코랄, 화려한 오페라 아리아에 뒤지지 않는 서정적인 아리아, 거기에다 줄곧 진행 역할을 맡은 레치타티보(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의 창법)도 나온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멜로디와 리듬이 대중음악보다 더 대중성이 있지만, 마태수난곡은 다르다. 루터가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했던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바탕으로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은 영적 감성으로 작곡했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영혼이 통째 울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음악이다.
토마스교회에서 들은 마태수난곡
그래서인지 바흐가 토마스교회에서 마태수난곡을 처음 공연했을 때는 혹평이 많았다. 관람석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참사회는 1730년 8월 “칸토르(음악감독이란 뜻으로 바흐를 지칭)의 급료를 삭감하기로 결정하는 바 입니다”라는 조서를 남길 정도였다. 바흐는 1723년부터 1750년까지 27년간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토마스교회·니콜라이교회 등 주요 교회와 도시 전체의 음악감독 역할까지 맡았다. 당시에는 마태수난곡의 진가를 몰랐으니 지금 보면 실소가 나온다.
그런 마태수난곡을 만든 바흐가 오늘날 인류의 사랑을 받기까지는 선배인 루터와 후배인 멘델스존의 역할이 컸다. 15세기에 태어난 마르틴 루터(1483~1546), 17세기에 출생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 19세기에 등장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1809~1847). 서로 얼굴을 마주친 적은 없지만, 세기를 뛰어넘은 세 사람의 인연은 특별하다. (바흐의 작품에 대해서는 주간조선 2750호 2023년 3월 20일 자 ‘338살 천재 할아버지가 남긴 명곡들’ 기사 참조)
우선 루터와 바흐는 혈육관계라고 느껴질 정도로 긴밀하다. 루터의 음악적 재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라틴어 학교를 다닐 때 어려운 라틴어 텍스트는 노래로 만들어 암기했다. 상급반에서는 음악의 기본 이론과 기초 훈련을 받았다. 류트(Lute·기타와 비슷한 현악기)를 비롯한 몇몇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작곡 능력도 있었다. 1527~1529년에 오늘날 개신교의 상징이 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한국찬송가 585장)를 작사·작곡했다. 루터는 “음악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대하고 기분 좋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루터는 음악개혁도 이뤘다
실제 루터의 종교개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음악개혁이었다. 당시 일반 신도들은 성당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 가사에다 무(無)반주와 운율(韻律) 중심으로 성가대가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기만 했을 뿐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하지만 루터는 일반 신도들이 쉬운 독일어로 찬송을 부르도록 했다. 음악은 종교개혁을 확산시키는 효과적인 무기였다. 독일인의 95%가 모르는 라틴어 대신 쉬운 독일어를 사용했고, 주민들 사이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는 민요의 멜로디까지 과감하게 도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를 코랄(Chorale)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찬송가의 시초와 서양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신학자이자 바흐 전문가였던 프리드리히 스멘드는 “마르틴 루터의 음악적 개혁이 없었다면 이후에 나온 바흐의 음악적인 성과도 볼 수 없었을 것”이라며 “또한 유럽의 모든 개신교 음악은 암흑기로 접어들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럼 바흐는 어떻게 루터를 존경하게 되었을까. 바흐의 가문은 200여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해낸 뿌리 깊은 루터교 가문이다. 바흐 가문의 시조인 바이트 바흐(Viet Bach)는 헝가리에 살고 있었는데 반(反)종교개혁 움직임이 일어나자 루터교 신앙을 지키려고 독일로 옮겼다. 바흐 집안은 매년 한 번씩 날짜와 장소를 정해 가족 모임을 가졌다. 바흐 가문이 모이면 예배를 드리는데 그 시작은 찬송이었다. 이런 가문에서 1685년 3월 21일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태어났다. 바흐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 루터에 대한 존경심으로 평생 살았다. 바흐는 거의 모든 곡에다 라틴어로 ‘J.J.(Jesu Juva·예수님 도와주소서)’라고 적고, 끝에는 ‘S.D.G.(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라는 사인을 남겼다. 그래서 바흐를 두고 “신학을 작곡했다”는 말을 한다.
“바흐는 신학을 작곡했다”
바흐는 루터가 작사·작곡·편곡했거나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코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령 루터가 만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코랄을 소재로, 모두 8곡으로 구성된 걸작 교회칸타타(BWV 80)를 만들어 냈다. 또 한스 레오 하슬러가 만든 ‘내 마음의 혼란’이란 세속 가요를 코랄로 변형한 ‘오 거룩하신 주님’(한국찬송가 145장)을 마태수난곡에다 5번이나 삽입시켰다. 장중한 합창과 아리아 속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이 곡은 쉽고 익숙한 멜로디로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한다.
이렇게 다른 영역의 노래까지 코랄로 흡수하는 것을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고 부른다. 같은 선율에 다른 가사의 노래가 나온다. 예술적 창조성이란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신도들이 찬송가를 쉽게 따라 부르기에는 그만이다. 일제강점기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에다 애국가 가사를 붙인 것을 비롯, 요즘도 영국 국가(피난처 있으니)나 독일 국가(시온성과 같은 교회)를 한국찬송가로 부르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바흐가 태어났고 아버지가 사망한 10세까지 살았던 아이제나흐는 바로 루터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이기도 하다. 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성(城)에 10개월간 숨어서 신약성경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독일 중부지방의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제나흐는 특히 루터하우스와 바흐하우스가 관광객들의 인기를 모은다. 루터는 1539년 라이프치히에도 종교개혁 열풍이 불자 토마스교회에 가서 설교하기도 했다.
38세에 뇌졸중으로 요절한 천재 음악가인 멘델스존 역시 루터와 바흐와의 인연이 깊다. 멘델스존은 베를린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지냈다. ‘세계적인 음악 도시’로 꼽히는 라이프치히를 가보면, 최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있는 게반트하우스에서 길을 건너면 주택가에 멘델스존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토마스교회에서도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위치다.
멘델스존은 그의 이름 펠릭스(라틴어로 행운이란 뜻)에서 나타나듯 요즘 말로 ‘금수저’였다. 원래 유대인인 그는 당대의 유명 철학자였던 할아버지, 은행장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다양한 예술을 배웠고, 유럽 여행도 자주 했다. 그의 교향곡 제3번이 ‘스코틀랜드’, 제4번이 ‘이탈리아’인 점만 보아도 그렇다. 성장 배경 덕분인지 멘델스존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화사하고 아름답다. 멘델스존은 아버지 때 가족이 개신교로 개종을 했다. 이후 멘델스존의 음악은 급속하게 루터와 바흐를 따랐다.
멘델스존은 루터의 다양한 코랄을 오르간 소나타 등 자신의 작품에 수록했다. 멘델스존은 11세 때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비텐베르크를 처음 방문했다. 당시 그는 베를린에서 첼터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있었는데, 첼터와 함께 바이마르로 가는 길에 비텐베르크를 들렀다. 어린 멘델스존은 비텐베르크 교회의 유서 깊은 오르간을 연주해 보고는 매우 기뻐했다. 멘델스존은 1830년 베를린에서 열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30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교향곡 제5번 ‘종교개혁’을 작곡하기도 했다. 물론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코랄을 테마로 삼았다.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킨 멘델스존
바흐에 대해서는 자칫 사장(死藏)될 뻔한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생존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바흐의 위대함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사실 바흐는 1725년 예수의 수난 과정에 대한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거룩함을 훼손당할까 봐 오페라 음악은 절대 안 된다는 당부를 받았다. 그래서 바흐는 후세에 유행하는 ‘오라토리오 수난곡’이란 형식을 만들어 냈다. 오라토리오는 노래하는 중간에 아리아를 삽입하는 오페라와 비슷한 형식이어서 종전의 수난곡에 비해 길었다. 꽤 긴 데다 음악 형식에도 익숙하지 않아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리하여 1750년 바흐가 사망하자 마태수난곡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당시에는 ‘공연음악은 일회용’이란 인식이 강했고 연주가 끝나면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종이가 귀한 시대여서 한 번 연주된 악보는 포장지로 팔려 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멘델스존은 1823년 14세 생일 때 할머니로부터 마태수난곡 악보 필사본을 선물받았다. 2010년 개봉된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에서는 멘델스존이 정육점의 고기 포장지를 열어 보니 마태수난곡 악보였다는 재미있는 스토리가 나오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어쨌든 사라져 가는 명곡의 악보를 손에 쥔 멘델스존은 음악계 지인들의 협력을 얻어 2년에 걸쳐 치밀한 준비와 리허설을 했다. 드디어 20세 때인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음악협회홀에서 마태수난곡을 연주했다. 바흐 사망 이후 단 한 번도 연주되지 않던 작품이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거장의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자 청중은 뜨거운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사실 처음에는 멘델스존의 스승이자 바흐 신봉자인 첼터마저도 “그런 고루한 음악을 누가 듣겠느냐”며 말렸으나, 멘델스존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자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이후 바흐의 전기를 만들고, 바흐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1841년 4월 4일에는 과거 바흐가 초연을 했던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에서도 마태수난곡을 공연하는 감격을 누렸다고 한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존경하게 된 계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 제1번(BWV 846)은 언제 들어도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는 곡이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은 서구음악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12음계의 모든 장조와 단조가 사용되었다. “혹시 무슨 재앙으로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해도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만 남는다면 서양음악을 재건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독일의 천재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 곡들이 건반악기의 신약성경이라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은 건반악기의 구약성경”이라고 말했다. 멘델스존이 음악적·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의지했던 누나 파니는 13세에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모두 외우고 연주했는데, 4살 적은 멘델스존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바흐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지녔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흐의 작품 수는 1128곡이다. 즉 BWV 1128까지 있다. 언제 BWV 1129가 등장할지는 모를 일이다.
보통 클래식 음악의 법칙에는 화성법(和聲法)과 대위법(對位法)이 있다. 화성법은 높이가 다른 2개 이상의 음이 동시에 울리면서 생기는 화음을 기초로 하여 선율을 조직하는 기법이고, 대위법은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 기법이다. 최고 수준의 대위법이 사용된 작품이 바로 바흐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푸가의 기법’(BWV 1080)이다. 바흐는 후대 작곡가들을 위한 교과서로 이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바흐는 작품을 완성하기도 전에 백내장이 왔고 존 테일러라는 돌팔이 영국 의사에게 수술을 잘못 받고 실명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쓰다가 15번째 푸가의 239마디에서 곡이 끊겼다. 바흐는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소명이 다 끝났다”면서 홀가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위를 불러 자신이 불러주는 멜로디를 받아 적게 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저는 이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BWV 668)이다.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요즘 라이프치히와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흐 동상 앞에는 생일(3월 21일)을 축하하는 꽃다발이 4월까지도 계속 놓여 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바흐는 영원히 살아 있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모든 음악 장르를 다 잘하기 어려운데, 바흐는 못하는 게 없는 음악가였다”라며 “바흐의 음악구조와 형식은 완벽 그 자체인데다, 무궁무진하게 변주(變奏)가 가능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찬사를 받는다”고 말했다. 일본 출판사에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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