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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의 역사
박준원 2025-01-03 추천 0 댓글 0 조회 7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기독교장로회


1. 요약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조선신학교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이다. 1946년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에서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정을 받았다. 평양신학교는 개교가 불투명해지자 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은 장로교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1947년 제33회 총회에 조선신학교의 신정통주의를 비판하는 호소문을 제출하였다. 1953년 분립을 선언한 평양신학교 계열은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총회 명칭을 개칭하였다. 1961년(제46회 총회)에 지금의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변경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함께 한국장로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개신교단이다. 조선신학교 사건(지금의 한신대학교)을 계기로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분립을 선언하였다. 김재준, 장준하, 안병무서남동, 문익환 등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개혁과 민주화, 인권, 통일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2. 역사

1946년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에서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나 평양신학교는 개교가 불투명해지자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한 신정통주의 신학이었다.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은 이러한 학교의 신학사상과 교육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1947년 제33회 총회에 호소문을 제출했다. 그 핵심 내용은 조선신학교의 신학이 성서문자 무오설을 부인하는 19세기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장로교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신학교의 신학사상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1948년 제34회 총회에 조선신학교 이사진과 교수진의 총퇴직이 건의되었으나, 총회에서 이 건의가 부결되자 반(反) 김재준파(金在俊派), 곧 평양신학교 계열은 박형룡(朴亨龍)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라는 명칭의 새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제35회 총회(1949년)는 이 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로 또 인허하고 아울러 두 신학교의 합동안도 통과시켰다. 합동안은 ① 신학교육은 순복음주의에 기초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준수할 것, ② 양교 교직원은 총퇴직할 것, ③ 교장은 한인 가운데 원로목사가 맡을 것, ④ 교수 구성은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서 3인, 남장로교 선교사 중에서 2인, 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중에서 각 1인씩 선임하며 이들이 신학의 주요 과목을 맡고 한인 중에서 약간 명을 교수로 선임하되 남은 과목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에서는 ① 양교 교직원은 무조건 합동한다. ② 교장 · 교수의 선임은 선교사 · 한인 구별없이 자격있는 자를 이사회에서 이사회에서 선임한다는 내용의 합동안을 제출하자 총회의 합동안의 통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가 성서관의 차이로 격렬한 논쟁을 하고 있었을 때,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교장인 맥카이(John A. MacKay)와 세계적인 신학자 브루너(Emil Brunner)가 내한하여 한국교회에게 복음적인 깊이와 세계적인 신학적 안목을 가질 것을 역설하고 축자영감설주1과 성서문자 무오설은 성서를 우상화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1951년 6 · 25전쟁 중에 부산에서 속개된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박형룡파)의 총회 인허를 공히 취소하고 노회의 수의도 거치지 않은채 대구에 제3의 신학교 건립을 위법적으로 통과시켰다. 이 학교의 교장은 선교사 김부열이 맡고 박형룡은 교수가 되었다. 1952년 제37회 총회에서 수적으로 우세하게 된 평양신학교 계열은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의 개명)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①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며, ② 김재준의 교수직을 박탈하고 그가 속해 있는 경기노회로 하여금 그를 목사직에서 제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③ 성서축자영감설을 부인한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Scott,W.M., 徐高道)를 처벌했으며, ④ 한신측의 사상을 찬성, 지지하는 자는 해당 노회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했다.

이러한 결의에 항거하고 비판하는 소리는 모두 묵살되었고, 경기노회가 김재준을 제명할 이유가 없다고 제38회 총회에 보고하자 총회는 일방적으로 김재준의 파직을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불법적인 결의의 시정을 김세열 외 80명이 호소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어 한국신학대학교 지지자들은 총퇴장하였다. 이후 이들은 1953년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제38회 호헌총회를 소집하여 총회장에 김세열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제36 · 37회 총회 결의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한국장로교 총회를 정당하게 계승함과 아울러 발전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새 총회는 옛 총회가 헌법과 통용규칙을 유린했고 신앙양심을 억압하며 당파적 고집으로 한국장로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규탄하면서 새 총회의 소신과 지도이념을 천명하였다. 그 내용은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인한다. ②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는 것 등이었다.

새 총회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총회 명칭을 개칭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와의 혼돈을 피하기로 하였으며, 이 명칭은 1961년(제46회 총회)에 지금의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변경되었다. 1954년에 목포노회가, 1955년에 전남 · 경남노회가, 1956년에 경기 · 충북 등이 새 총회에 가입하여 총회의 기틀을 잡아갔다. 1956년 새 총회는 종래의 선교부 제도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 결과 1957년 제42회 총회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상 처음으로 외래선교사업을 한국교회 총회가 관장하게 하였다. 1956년에 부목사와 여장로제도, 1974년(제59회 총회)에 여목사제도, 1984년에는 생활보장제를 처음으로 채택하여 진보적인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제도면에서 보였다. 새 총회는 세계장로교회의 전통에 따라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57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하는 것을 비롯하여 1958년에는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KCWS)에, 1959년에는 동남아기독교대회(EACC, 현재는 아시아기독교대회, CCA), 세계장로회연맹(현재의 세계개혁교회연맹, WARC), 대한기독교교육협회(KCCE)에,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1974년에 독일 서남지구교회 및 선교협의회(EAS), 1976년에 백림선교협의회(BMW), 1980년에 스코틀랜드교회, 1982년에는 뉴질랜드 장로교회, 1983년에는 미국연합교회 등 세계 각 교회들과 선교협력관계를 계속 확대해 나감으로 선교지역을 세계로 넓혀 나갔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세계적으로도 한 교단의 위치를 다져감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총회의 규칙, 정치를 1962년까지 최종적으로 수정, 공포함으로써 단일 교파로서 조직을 정비해갔다. 그리고 교단의 이념과 입장을 보다 심화시키고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교육정책」(1969) · 「교회교육지침서」(1970) · 「사회선언지침」(1971) · 「신앙고백선언서」(1972) · 「선교정책」(1973)을 채택 발표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국교회가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제정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3. 현황

2020년 현재 28개 노회, 1600여개 교회, 124개 시찰위원회, 30만여 명의 교인이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영생고등학교, 한신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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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韓國基督敎長老會, 기장 )


한국의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 등 4개의 외국 선교부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전래되어 일제의 심한 압박 속에서도 단일 교단을 유지했다. 그러나 8·15해방과 더불어 신학노선의 차이, 신앙의 경건성 문제, 교회정치의 문제 등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는 곧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탄생시킨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열은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한국신학교의 전신) 교수들의 신학 사상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신학교측의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에 대한 비판이 8·15해방 이후 표면화되면서 1949년 6월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가 박형룡을 교장으로 개교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49년 남부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지정하고 1951년 대구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통합·폐교한다는 의도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자 조선신학교는 이에 불복했다. 오히려 조선신학교는 1952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칭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1952년 4월 대구에서 가진 제37회 총회에서 성서오류설을 주장한 김재준을 경기노회에 명하여 목사직을 제명시키자 이에 9개 노회의 대표 47명이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강당에 모여 기독교장로회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했다. 이듬해 6월 1일 교단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고치고, 1956년 여장로제도를 채택했다. 1957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가입했으며, 한국신학대학을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에서 강북구 수유리로 이전했다.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 세계대회에서 강원용이 실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때 교파명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다. 1970년대 독재정치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신앙과 양심의 수호를 위해 3·1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는 등 정부와의 잦은 마찰로 한국신학대학의 학생과 교수, 교역자들이 수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0년 기독교장로회의 신학교육을 담당한 한국신학대학이 한신대학으로 종합화되었다.
기독교장로회는 교육정책과 지침서(1970), 사회선언지침(1971), 신앙고백선언서(1972), 선교정책(1973) 등 교단의 기본 신학과 선교방향을 제시한 문서 등을 남겼다. 총회 산하 13개의 노회와 월간 〈기장장로회보〉를 발간하고 있다.

** 김재준(金在俊) **
* 출생 : 1901년 * 사망 : 1987년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
호는 장공. 일본 아오야마[靑山]신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구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여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1935년 '아빙돈(Abingdon)단권성경주석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과 함께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8·15해방 이전에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한국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로 부각된 것은 8·15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즉 그는 1947년 성서비평에 입각하여 모세오경 저작 문제와 십계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강의했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에 대해 당시의 보수적 학생들의 항의를 받게 되었고, 이 사건이 비화되어 1952년 장로교 총회에서 제명되었고,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별도로 분립되었다. 그는 이 교단에서 자유로운 신학 연구와 강의를 했으며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적 배경을 성립시켰다. 1970년대부터는 사회문제에 적극 관심을 보여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 문익환(文益煥) **
* 출생 : 1918년 * 사망 : 1994년
호는 늦봄. 만주 북간도 출생.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의 3남 2녀 중 장남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북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도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본의 동경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학병 거부로 퇴교되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뒤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의 구약 번역책임자로 8년 동안 일하였다.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투쟁에 나섰으며,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다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년),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년), 제4차범민족대회 대회장(1993)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하다가 1월 18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의 삶의 과정을 볼 때, 무엇보다 성직자(목사)와 신학자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부터 만주의 만보산한인교회와 신경한인교회, 구미교회, 을지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등 개신교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한 구약학자로서 16년 동안 대학의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구약 성서의 번역에 공헌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인으로 등단하여 7권의 시집과 많은 수필집, 산문집 등을 출판하였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던 장준하의 횡사 이후 「3·1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하면서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다.
그의 활동은 1978년 유신헌법비판성명서 발표, 1980년 YWCA 위장결혼사건, 1986년의 인천 5·3사건과 서울대학교 연설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 통일운동에 매진하여 재야 통일관련 단체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1989년에는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여섯 차례 투옥되어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3회 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에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한 하늘 두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등이 있고, 수필집에 『새 것, 아름다운 것』(1984)이 있으며, 『꿈이 오는 새벽』(1984), 『통일을 비는 마음』(1989), 『히브리 민중사』(1990),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등이 있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로고 **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연합)와 온 세계(오이쿠메네), 에큐메니칼(일치) 정신을 상징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장'의 약자를 상징합니다.
화살표는 나아가는 화살처럼 새 질서를 향한 희망의 전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젊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인내, 정의를 상징합니다.

 평화와 부활을 뜻합니다.

지난 2003년 6월 1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새 역사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엠블럼.

총회는 새 역사 50주년(희년)을 맞이하여 '희년선포문'을 발표하였다..

 


2003년 2월 1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우리는 1953년 “복음의 자유, 신앙 양심의 자유, 자립·자조의 정신, 세계 교회 정신”을 널리 선포하고 장로교 신조와 신앙 전통의 맥을 이어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출범하였다.
지난 50년 간 우리 기장은 어두운 역사에 잠겨있던 이 땅에 새 날을 밝히며, 새 역사를 이루어 가는 생명탑을 쌓기 위해 노력해 왔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 위에 실현하고,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하늘의 씨앗들로 살면서 이 역사의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하여 십자가 기도의 행진과 함께 눈물로 복음의 씨를 뿌려왔다.
우리는 2003년 새 역사 희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첫 출발의 다짐과 고백을 되새겨,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약속의 새 땅에서 하나 되어”를 우리의 주제로 삼고,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 원년으로 삼으려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로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행진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모으고 결의를 다지는 “새 역사 희년대회”를 시작하며 우리 기장의 희년을 선포하고자 한다.
새 역사 희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이 새 역사 희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하는 교회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다하며, 동시에 희년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화 되도록 다음의 선교 과제를 기장 공동체의 기도 제목으로 고백한다.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1. 파괴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회복시켜 이 땅이 생명공동체가 되도록 정의와 평화를 구현한다.
2. 물신숭배와 폭력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전환시킨다.
3.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일구어낸다.
4. 분열된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고백하여 일치를 이룬다.
5. 교회를 갱신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룬다.
6. 남녀간의 평등과 세대간의 화합을 도모한다. 
7. 이웃사랑 정신으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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