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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길(헨리 나웬)
박준원 2022-01-14 추천 0 댓글 0 조회 299

헨리 나웬의 마음의 길’ 중에서 <첫 번째 보물고독(Solitude)>

 

사막의 교부들 중 최고의 교부로 알려진 안토니우스는 고독에 있어서만큼은 최고의 안내자입니다그는 251년 경 이집트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세쯤 되었을 때 교회에서 마태복음1921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안토니우스는 이 말씀을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깨달았습니다그는 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사막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20년 동안 완전한 고독 속에서 살았습니다사막에서 그는 굉장한 시련을 체험했습니다사막의 심연이 그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공로를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권에 대한 승복 때문이었습니다그가 깊은 고독에서 다시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이 참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사람들은 그에게 치유와 위로 그리고 기도를 받으러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안토니우스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 날마다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356년에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106세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고독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형이 일어나는 용광로라고 말합니다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이 변형곧 회심한 자기에게서 출발합니다.

 

1. 분노와 탐욕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중요한 두 개의 적은 분노와 탐욕입니다이 둘은 세속적 가치들의 열매들입니다세속주의는 우리의 환경에 대한 반응에 의존하는 것입니다세속적이거나 거짓된 자기는 사회적 강박에 의해 날조된 자기입니다나는 누구인가나는 칭찬을 받고인정을 받습니다반대로 나는 미움을 받고 멸시를 당합니다중요한 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입니다.

분노는 가지지 못한 체험에 대한 충동적 반응이며비판적인 말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입니다또한나의 욕구가 좌절될 때 탐욕은 솟아오릅니다탐욕과 분노는 세상에 의해 날조된 거짓 자기의 남매입니다때로 우리는 부드러운 말과 웃는 얼굴 뒤에 숨어 있는 교활한 분노를 발견합니다우리는 더 많은 일더 많은 돈더 많은 친구를 모음으로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고독은 우리를 이처럼 거짓된 분노와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2. 변형의 용광로

안토니우스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분노와 탐욕에 물든 세속주의에서 탈출하라는 부르심으로 알아들었습니다그는 가난하게 살면서 노동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그는 가장 큰 적들인 분노와 탐욕과 대면하였고 끈질긴 싸움 끝에 낡고 거짓된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기 위해 사막의 완전한 고독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독은 변형의 용광로입니다예수님도 광야에서 이 용광로로 들어가셔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유일한 원천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고독은 중요한 싸움터이고 중요한 만남터입니다.

우리는 먼저 고독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고독은 자기를 위한 시간과 장소이며 재충전할 수 있는 것즉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새로운 힘을 모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사막의 교부들에게 있어서 고독은 개인적인 치료나 충전 장소가 아닙니다그것은 회심의 장소요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는 장소요새로운 사람의 출현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고독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형시키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먼저 고독 속에서 직면해야 하는 것은 무()니다내 안에 있는 무가 두려워 우리는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내가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고 대단한 매력적이라는 사실에 목숨을 겁니다자신의 무어두운 심연에서 도망쳐 나와 모든 허영 속에 있는 나의 거짓된 자기를 늘 찾아 방황합니다.

고독이라는 과제는 고독 속에서 참는 것이고 나를 유혹하는 모든 방문객이 나의 방문을 두드리다 지쳐서 나를 혼자 두고 떠날 때까지 내 방에 머무는 것입니다사막 교부들의 지혜는 거짓 자기가 날뛰도록 돕는 마귀에 대항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싸울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대신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 포기하기를 우리에게 요청합니다예수 그리스도만이 악의 세력을 이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독의 시련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한 사막의 수도자가 기도 중에 마귀가 찾아와 자기 손을 꽉 붙들고 끌고 가려고 하였습니다그 때 수도자는 문고리를 붙자고 주 예수여나를 구하소서하고 소리를 쳤습니다그러자 즉시 마귀가 도망을 갔습니다그리고 그는 울기 시작하였습니다주님께서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그가 말했습니다. ‘마귀들이 감히 사람을 붙잡고 함부로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면즉시 너는 내가 네 곁에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고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선 우리 주님과 만나고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서입니다고독에서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생각과 마음을 다해 바라보는 것입니다우리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만 우리의 죄와 직면할 수 있고 치유의 장소에서만 우리의 상처를 보여줄 수 있으며 우리의 두려움을 포기하고 우리 참된 자신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자기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우리의 분노와 탐욕에 물든 거짓 자아들을 서서히 녹여 없앨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그때에 우리는 웃으며 돌아볼 수 있고 더 이상 분노하거나 탐욕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고독의 시간과 장소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주님의 임재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사막을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이러한 사막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우리 자신의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이러한 영적 거처가 있으면 우리의 중심은 점차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는 주님과 함께주님하고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마련하는 것입니다내가(헨리 나웬 신부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방문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경배하는 데 하루에 한 시간을 보내십시오그리고 당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결코 하지 마십시오그러면 당신은 괜찮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주님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만남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고독은 정화와 변형의 자리요위대한 투쟁과 위대한 만남의 자리입니다고독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독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고독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을 닮은 존재로 변형시키시고 탐욕과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자리입니다.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20년을 지낸 후 그곳을 떠날 때 자신의 고독을 함께 가져왔습니다그리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과 그 고독을 나누었습니다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균형잡히고온화하고배려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3. 공감

고독은 우리를 공감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공감은 고독의 결실이고 모든 신앙생활의 토대가 됩니다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정화와 변형은 공감으로 나타납니다주님의 가장 귀한 선물은 어떤 놀라운 권능이 아니라괴로워하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이 공감적 관계가 생기는 것은 바로 고독 속에서입니다.

고독 속에서 우리의 돌처럼 굳은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완고한 마음이 죄인의 마음으로폐쇄된 마음이 열린 마음의 몸짓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이를 통해 고민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고독이 공감을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사막의 교부 모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위해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낮선 표현입니다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죽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우리의 의도와 가치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형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회의가 소집되었고 거기에 압바 모세스가 초대되었습니다그는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사람들을 보내어 재촉하였습니다. ‘오십시오모든 사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새는 주전자를 들고 거기에 물을 채워서 갔습니다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죄는 내 뒤로 새어 버렸습니다그래서 나는 그 죄를 볼 수가 없습니다오늘 나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자 어 이상 형제에게 죄를 묻지 않고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4. 결론

우리는 위대한 싸움과 위대한 만남이 있는 고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우리가 공감적인 사람이 되고 모든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며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에게 손을 뻗칠 준비를 시키는 것이 바로 이 고독 속에 있습니다우리 삶의 목표는 살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헨리 나웬의 마음의 길’ 중에서 <두 번째 보물침묵(Silence)>

 

침묵은 고독을 보강하며 완전하게 합니다다음의 마카리우스의 이야기는 이 말을 입증해 줍니다. ‘수도원장 마카리우스는 스케테에 있는 교회에서 형제들에게 복을 빌어 준 다음 그들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이여피하라고 했습니다연장자 중의 한 사람이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이곳 사막에 있는 이상어떻게 이곳보다 더 멀리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그때 마카리우스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고 이 입에서 피하라고 말했습니다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침묵은 고독을 현실의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사막의 교부들은 침묵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로서 찬양했습니다아르세니우스는 나는 종종 말한 것을 후회한다그러나 여전히 침묵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압바 팜보는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대주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형제들이 불안해하면서 어떤 말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분이 나의 침묵으로 교화되지 않는다면 나의 말로도 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은 영적 생활에서 꼭 필요한 방법입니다야고보서에서도 침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3:3-6) 침묵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고독입니다말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침묵을 지키고 살 수 있을까여기에 답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말 많은 세상

우리는 말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그들은 우리 존재의 바닥과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또한 수많은 광고의 홍수 속에서 그들은 말합니다. ‘나를 사용해 보시오나를 데려가시오나의 냄새를 맡아보시오.’ 끊임없이 소비의 유혹의 함정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말을 포함한 모든 말이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말의 홍수로 우리는 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은 말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선생님들은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에게 말을 합니다그러나 학생들은 그것들은 말 뿐이었다라는 느낌을 가집니다목회자들은 평생 설교를 합니다그러나 성도들은 흔히 그것들은 말뿐이라고 생각합니다정치가들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들은 말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결과 말은 이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말은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바탕을 제공하지 못합니다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침묵에서 생겨났고우리가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침묵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2. 침묵

침묵은 말의 고향입니다침묵은 말의 힘과 풍부한 결실을 제공합니다어떻게 보면말이란침묵의 신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중국 철학자 장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물고기를 잡는 통발의 목적은 물고기를 잡는데 있고 물고기가 잡히면 그 통발은 잊혀집니다토끼를 잡는 덫의 목적은 토끼를 잡는데 있으며 토끼가 잡히면 그 덫은 잊혀집니다말의 목적은 생각을 전하는데 있습니다그 생각이 전해지고 이해되면 그 말은 잊혀집니다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그는 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진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장자의 고백은 사막의 교부들의 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그들에게 말은 현재 세계의 도구일 뿐이며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로 이해되었습니다때문에 사막의 교부들은 침묵으로 가는 것을 미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침묵의 세 가지 유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첫째침묵은 우리를 순례자로 만듭니다둘째침묵은 우리 내면에 있는 불을 지켜줍니다셋째침묵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3. 침묵은 우리를 순례자로 만듭니다.

압바 티토에스는 순례는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순례한다는 것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쉽게 죄로 인도합니다그러므로 침묵한다는 것은 죄에서 떠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야고보서 32절에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시편 391절에 혀를 함부로 놀려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악한 자 내 앞에 있는 한 나의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알려진 베네딕도는 형제들에게 악한 말을 하지 말도록 경고하였을 뿐 아니라또한 그들에게 착하고 거룩한 말그리고 교화하는 말들도 피하라고 하였습니다잠언 1019절 말씀처럼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하고 우리를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말 가운데 차라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말들은 종종 우리에게 정신적 패배감을 안겨줍니다말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진흙탕에 빠지게 만듭니다말은 우리로 하여금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여행하는 우리에게 들어오도록 초대한 소명을 받은 순례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합니다순례한다는 것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하는 것은 우리를 순례자의 상태로 머물게 합니다.’

 

4. 침묵은 마음속에 있는 불을 지켜줍니다.

침묵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내적이고 영적인 불을 지킨다는 것입니다이 내적인 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생명력입니다따라서 침묵은 하나님의 내적인 불을 보살피고 살아 있도록 하는 훈련입니다디아도쿠스는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증기탕의 문이 계속 열려 있으면 안에 있는 열은 급속히 그 문을 통해 나가버립니다마찬가지로 영혼은 많은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것이 비록 좋은 것일지라도 말문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마치 성령님이 없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합니다소중한 생각은 수다를 피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적시의 침묵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침묵은 나눔이 미덕인 우리의 비위를 굉장히 거슬리게 합니다우리는 감정정서우리의 영혼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당신과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기쁩니다.’라는 표현은 증기탕의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우리의 분별없는 나눔의 태도가 덕이라기보다는 강박적인 충동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가끔 우리는 어떤 모임에서 귀중한 무엇인가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거룩한 땅이 짓밟힌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집으로 온 경험이 있습니다해너이라는 사람이 쓴 사막의 교부에 대한 논평 중의 한 부분입니다.

입은 어떤 악이 들어오는 문이 아닙니다귀는 눈과 같이 하나의 문입니다사막의 교부들이 내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문을 열어 놓으면 도둑이 마굿간에서 말을 끌어내 가는 것처럼 누군가가 그들의 마음에서 훔쳐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지켜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불을 최대한 조심해서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많은 말을 하고 많은 체험을 나누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마음속에 계신 성령님의 불이 죽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이러한 사람들에게서는 삶의 지루함옹졸함편협한 감정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그 불을 끄는 것은 말많은 불신앙일 수 있습니다마음의 불을 충실하게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길 잃은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함과 빛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화가였던 고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영적 고백을 들려줍니다.

우리 영혼에는 큰 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일찍이 아무도 그 불에 쬐어 몸을 녹이려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나그네는 굴뚝에서 나오는 작은 연기를 보고 자신들의 길을 갈 뿐입니다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누구나 영적인 불을 돌보아야 하고 마음속에 소금을 가졌야합니다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와서 앉거나 머무를지도 모르는 그때를 위해 얼마나 많은 간절한 소망을 갖고 끈기있게 기다려야 합니까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조만간에 다가올 그때를 기다려봅니다.’

고흐는 굴뚝을 통해 나오는 연기만이 아니라 불을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의 불에 와서 앉지 않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위안과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가장 큰 유혹은 너무 많은 말에 대한 것입니다많은 말은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킵니다그러므로 침묵은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불을 지키는 거룩한 수련입니다.

 

5. 침묵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가르친다.

침묵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가르칩니다힘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온 말입니다결실을 맺는 말은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입니다침묵에 바탕을 두지 않는 말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하나님은 영원한 침묵에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때가차매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침묵의 풍요함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자들은 깊은 침묵에 참여하였습니다침묵에 참여함으로 하나님 말씀에 참여하였습니다이러한 침묵은 그들을 새로운 삶으로 창조해 갔습니다.

우리가 말로써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거나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정을 해치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면그 말은 더 이상 침묵이 아닙니다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지점에서는 말이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침묵은 신비입니다침묵은 우리를 순례자로 남게 하여 수많은 걱정에 얽매이지 않게 합니다침묵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불을 지킵니다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창조적 능력에 참여하는 말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6. 침묵의 어려움

소란한 사회에서 침묵은 어렵고 두려운 일입니다많은 사람들에게 침묵은 근질거림과 신경질을 불러일으킵니다침묵을 충만한 것이 아니라 공허한 것으로 체험합니다침묵은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과 같습니다예배 중에 우리 잠시 동안 침묵하겠습니다.’하고 말하면곧 불안해지고 언제 끝나는가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게 됩니다강요된 침묵은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공허한 침묵을 충만한 침묵으로불안한 침묵을 평안의 침묵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과의 진정함 만남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침묵과 친구가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말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진정한 침묵은 입의 침묵이 아닌마음의 침묵입니다압바 포에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이 말없이 있을 때 그가 침묵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만일 그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있으면 그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참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은 사랑으로 인도하는 마음입니다어떤 여행자가 침묵수도자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신이 규칙을 깨뜨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미안해하자그 수도자는 나의 규칙은 나를 만나러온 사람들에게 덕을 행하고 그들을 편안히 집으로 보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침묵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침묵은 우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성향입니다침묵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휴대하는 이동식 방이며침묵에서 우리는 곤궁한 사람들에게 말하고우리의 말들은 결심을 거둘 후에 침묵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말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보살피는 침묵을 불러일으키느냐는 것입니다우리는 모두 이 침묵에 불림을 받았습니다말은 현재 세계의 도구이지만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입니다.



헨리 나웬의 마음의 길중에서 <세 번째 보물, 기도>

 

*헨리나우웬 신부님은 예일대 신학대학원 교수 (하버드대) 다양한 종교/인종 16

1. 고독 : 사막으로 가라! (->회개의 변화/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형)

2. 침묵 : 더 깊은 사막으로 가라! (성령의 불/하나님의 말씀/한증막이야기!)

 

고독과 침묵은 기도를 위한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고독을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고독과 침묵은 기도가 행해지는 자리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와서 쉬시오라는 의미입니다.

헤시키아()라는 그리스어는 사막의 영성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 영성가들을 헤시키스트라고 부릅니다. 헤시키스트들은 끊임없는 기도의 길로서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며, 그들의 기도는 휴식의 기도입니다. 격렬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서 쉬는 휴식입니다.

 

암마 테오도라 사단의 세력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힘을 낭비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병이 들어 더 이상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경계하고 있으면 이 모든 유혹들은 사라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지성의 기도를 먼저 살펴보고

헤시키스트들이 드리는 마음의 기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지성의 기도

기도가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은 기도를 적게 하거나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지성의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사단의 계략)

이러한 편견은 기도를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것이나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한정시킵니다. 기도는 아주 일방적인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 줍니다.

내가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 기대하게 됩니다.

내가 기도를 청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내가 어둠 속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가?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숨바꼭질의 명수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공허한 기도보다는 사람들과 확실한 대화가 더 의미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다른 의미의 지성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해 새롭고 지적인 발견으로 인도하는 기도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연구를 통해 깊은 통찰을 얻으려는 노력처럼 하나님과 말씀을 연구하여 깊은 통찰을 얻어 더 많이 더 자세히 알려고 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지성적 기도의 성향은 지성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데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문화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이해되고 이해된 것은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나님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우리는 지성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공식 복장이 대학교의 학위 가운이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성주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 과제는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현 시대는(1998) 지성의 한계를 발견하여 다른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성의 시대에서 새롭게 기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기도생활의 위기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의 머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 가득차 있다는데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헤시키시트 사막의 영성가들에게서 찾아보겠습니다.

 

2. 마음의 기도

영혼을 하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휴식으로 인도하는 헤시키시트의 기도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지성 지향적인 우리에게 특별히 마음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정말 중요합니다. 마음의 기도에 대한 좋은 안내글이 있습니다. 러시아 은수자 테오판의 글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지성과 함께 마음속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당신 안에 영원히 현존하시며 널리 만물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면전에 서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마음에 지성이 함께, 구분이나 구별이 없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라는 존재의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마음이 마음에게 말합니다.

 

마음의 성서적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마음이란? 감정적 작용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노애락이 일어나고 표현하고 담아내는 곳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서적 전통에서 마음은 모든 신체적, 정서적, 지성적, 의지적, 도덕적 에너지의 원천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감정이 일어나고 또한 이성을 가지고 지각과 이해의 중심을 이루며 끝으로 의지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곳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을 내립니다. 마음은 개인의 삶을 통합하는 기관이며 우리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곳일 뿐만 아니라 사단이 날카로운 공격을 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장소는 바로 이 마음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던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도는 우리 전체 인간성에 영향을 줍니다.

 

마카리스우스는 그리스도인의 주요한 과제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를 감정으로 채우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기도가 자신의 인격 전체를 변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의 영성가들의 가장 깊은 통찰은 마음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시리아의 이사악은 보물창고에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그것은 당신 안에 있으며, 그리하면 당신은 하늘의 보물창고를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즉 마음 안에 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의 기도는 지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 영혼의 순수한 곳까지 스며들어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진리에 영적인 눈이 뜨임으로 우리의 전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받아들여진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것도 감출 수 없기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무조건 내맡기는 것을 요구합니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폭로하고 우리를 자비로운신 하나님과 죄인의 참된 관계로 인도합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참된 휴식과 안식을 제공합니다. 이 진리가 우리 마음에 정착할수록 우리는 세상에 대해 덜 산만해지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3 마음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마음의 기도는 짧고 단순하게, 끊임없이, 더 넓고 깊게입니다.

 

1) 짧고 단순하게

 

압바 마카리우스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손을 펴들고 주여,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그리고 당신이 아시는 대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면 족합니다. 그리고 갈등이 생기면, ‘주님,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존 클리마쿠스는

당신이 기도할 때 장식적인 말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지성이 많은 말을 찾음으로써 신앙심을 혼란시키지 않도록 하십시오. 세리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라는 말 한마디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에 족하였습니다. 기도 중 어떤 말에 만족이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그 지점에서 멈추십시오.

 

한마디의 말의 조용한 반복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을 가지고 마음으로 내려가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주문이나 주술이 아니며 하나님께 마법을 걸어 우리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한마디 말이나 문장은 우리를 그 중심으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돕습니다. 조용히 앉아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면 우리 안의 생각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게 됩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예수님간단한 문장이나 단어를 사용하면 생각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기도는 우리 마음에서 혼란한 내적 활동을 몰아내고 그 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기도는 마음으로 내려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성서의 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20분을 보내면 우리는 서서히 마음에 작은 둥지를 치고 거기서 우리의 바쁜 날의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이 기도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기도는 어떤 통찰을 얻고 깨닫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보살핌에 대한 내적 체험을 하는 데 있습니다.

 

2) 끊임없는 기도

 

마음의 기도의 두 번째 특징은 끈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에 따라 이 놀라운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막의 영성가들 가운데 지나치게 영성화된 기도에만 접근하고 육체 노동은 수도자들에게 부적당한 것으로 생각한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중 몇몇 원로들이 압바 루치우스에게 찾아가서 노동에 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우리는 육체 노동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압바 루치우스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먹고 잘 때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압바 루치우스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갈대를 가지고 새끼를 꼬면서 하나님과 함께 앉아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루 일과 기도로 보내면서 대체로 돈을 열세 푼을 버는데 나는 내 돈의 두 푼을 문 밖에 놓아두고 나머지 돈은 음식을 위해 지불합니다. 문 밖에 놓아 둔 돈 두 푼을 가져간 사람은 내가 먹거나 잠잘 때 나를 위해 기도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이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세기의 러시아의 한 농부는 사도 바울의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영적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오랜 여정 끝에 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하루에 입술로 수천 번을 암송하였습니다. 어느날 문득 그는 그 기도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에서 자신의 마음으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날의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의 기도를 끊임없이 입술로 기도할 때, ... ... 끊임없이 고동을 치고 있는 나의 심장이 마치 맥박이 뛸 때마다 그 안에서 기도의 말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입술로 기도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3) 더 넓고 더 깊게

마음의 기도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맞닿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좁고 좁은 사고들이 하나님의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기도서약을 합니다. 슬픈 일은 선의에서 나온 관심의 표시로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기도를 드리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기도하게 됩니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가난하고 일그러지고 불안한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애로운 하나님의 얼굴까지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으면 소란한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이 휴식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간에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로 사람들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로마 귀족출신 아르세니우스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 받은 응답으로 세상을 피해라, 침묵을 지켜라, 그리고 항상 기도하라이 말씀을 붙잡고 사막에서 20년 동안 살았습니다.

 

고독, 침묵, 기도는 사막 영성의 핵심입니다. 고독은 우리의 행위가 세상의 분노와 탐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비롯되도록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침묵은 우리가 말 많은 세상에 의해 질식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끊임없는 기도는 고독과 침묵에 그들의 참된 의미를 부여합니다. 기도로 우리는 지성과 함께 마음으로 내려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변함없는 창조적 그리고 재창조적 사랑을 가지고 역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세 가지 영적 전통인 고독, 침묵,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산 증인으로서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다면 우리 자신이 옳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옳은 몸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의 임재를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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