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 10교시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P.70-)
9교시까지 교부시대에 대해 공부를 해보았는데 10교시부터는 중세시대로 넘어가겠습니다.
02 중세와 르네상스(700-1500년)
중세는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시대였습니다.
궁정과 수도원 뒤이어 대학교들이 신학적 성찰의 무대였으며 이곳에서 신학의 새로운 이론들이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가 꽃을 피움으로 더 큰 활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는 고전 시대를 창조적으로 수용해서 사회와 교회 전반의 사상과 삶을 되살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1) 중세의 정의
전통적으로 중세는 교부시대의 끝을 알리는 칼케돈 공의회(451) 때부터 서부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신학적 르네상스 때까지를 말하지만 동방의 비잔틴 문화를 배제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구분은 아닙니다.
중세라는 말은 근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고대로부터 다시 지성을 꽃피웠던 근대로 넘어오는 중간 시대를 말합니다. 중세라는 말은 고대 지적문화와 근대 르네상스의 지성과는 거리가 먼 시대라는 얕잡아보는 식의 표현이었습니다.
7세기 이슬람세력의 확장으로 안정이 깨어지고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11세기에 이르러서야 안정이 회복되면서 세 개의 주요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전 로마제국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가)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이 지역의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같이 지중해 동부에서 활동한 교부들의 저술에 크게 의지하였습니다.
나)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들, 이탈이라 북부 지역의 서유럽
로마와 교황을 중심으로한 기독교가 지배하였습니다. 파리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대성당과 대학교를 중심으로 신학이 발전하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프아티에의 할리라우스의 라틴어 저술들에 크게 의지하였습니다.
다) 지중해 남부와 동부 멀리까지 상당 부부을 아우르는 이슬람의 칼리프 왕조 지역
이슬람의 팽창이 계속되면서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5세기 말 이슬람은 스페인과 발칸 반도에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슬람의 팽창은 1490년 스페인에서 무어인이 패하고 1523년 비엔나 외곽에서 이슬람 군대가 패배함으로 멈추게 되었습니다.
9세기와 10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에 근거를 둔 동방교회와 로마에 터를 잡은 서방교회의 관계가 여러 이유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니케아 신조를 둘러싼 견해 차이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서방교회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고 동방교회는 성령이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라틴어 필리오케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뜻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대립이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동서교회는 1054년 최종적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으로 갈라선 이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방교회에서 정교회 전통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와서야 가능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세신학은 서방신학을 말하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까지의 동방신학을 비잔틴 신학으로 부릅니다. 이 기간에는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프랑스와 독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대학교들이 설립되면서 신학은 학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중세시대 대학교는 신학, 의학 법학의 세학부와 하위 과정인 교양학부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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