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심화과정 필독서3 : 침묵수업>
- 침묵수업 - 관상기도를 위한 안내서(마틴 레어드/ 이민재옮김), 한국 샬렘, 2006/2018.
들어가며... <하나님은 고향이다>
우리는 사랑의 고향을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7 우리는 관상을 위해 태어났다. 이 책은 관상이라는 가장 섬세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심오한 영적 예술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에 관한 책이다. 내면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관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8 인간의 귀소 본능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사랑의 고향을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아버지가 계시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8 이 책은 침묵수련을 위해 쓰였다. 침묵수련은 인간 존재의 근원인 이 고향과 더욱 친밀해지도록 용기를 북돋아줄 것이다.
8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성자이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영원한 침묵 속에서 언제나 전해주신다. 그래서 영혼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에 관한 격언)
8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다. ... 그분이 들으시는 유일한 언어는 사랑 속에서 우러나는 침묵의 언어인 까닭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일곱 번째 서신)
9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침묵하는 곳이 바로 침묵의 영지다. 하지만 다른 영토와 달리 침묵의 영지에 이르는 결정적인 지도는 없다.
9-10 폴린 마타라소의 <안과 밖>
나는 침묵을 바라본다.
전해들은 것과는 다르게도, 그것은
자연이 만든 디딤돌을 딛거나 아이젠을 신고
등산 고수들이 오른 적 있는
산의 정상 같은 게 아니었다.
...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그곳에 이르는 지도는 없다.
순종만이 데려다줄 뿐
10 이 책은 이러한 영성기술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이 침묵 수련을 통해 어떻게 그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지 살펴보려 한다.
10-11 관상수련이라 부르는 침묵수련은 영적 테크닉이 아니라 기술이다. 영성수련의 기술은 무엇인가가 저절로 일어나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11 정원사는 나무를 자라게 하지는 못하지만, 정원을 가꾸는 기술을 통해서 나무들의 성장을 촉진시킨다. 향해사는 바람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바람을 이용하는 기술을 통해서 향해를 한다. 관상수련에는 테크닉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이 바로 내적 침묵이다.
11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는 두 가지 중요한 관상 수련이 있다. 하나는 침묵수련이며, 다른 하나는 깨어있음(알아차림)수련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종교전통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이 스스로 발전시켜온 것이다.
12 이 책은 우리가 내적 침묵을 원할 때 실제로 직면하게 되는 많은 어려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1장에서는 기본 전제를 이야기한다. 즉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가 노력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다.
2장에서는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삶을 낭비하는지에 관해 설명할 것이다.
3장 이후에서는 관상 수련의 기본에 관해 언급할 것이다. 관상수련은 어떻게 내적 침묵을 북돋아주는가? 어떻게 흘려버리는 기술을 가르쳐주며, 명료하고 균형감 있게 영적 씨름을 하도록 도와주는가?
13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 안에 있는 성인과 현자들이 전해주는 지혜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하지만 몸소 수련하면서 실패도 해보고 직접 깨달아야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영성 전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13 침묵의 영지를 발견하기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적인 일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말해 그 누구도 내적 침묵의 고독을 혼자서 발견할 수 없다.
13 이 책은 침묵이야말로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라는 고대 그리스도교 관점을 계속 견지할 것이다.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지혜서18:14-15) 그곳, 침묵의 영지에서 하나님은 그야말로 영속적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14 침묵의 영지는 모든 영적 순례자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는 본향이다. <고향은 모든 순례자를 소음에서 불러내 침묵에서 샘솟는 기쁨으로 이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는 왜 우리와 함께 집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가?> (아우구스티누스)
14-15 침묵에서 샘솟는 기쁨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R.S.토머스는 그 일을 아주 절데된 언어로 묘사한다.
마음속엔 침묵이 깃드나니,
하나님이라 일컫는 침묵이 들릴 만큼 가까운 곳에서
우리가 깊은 행복에 젖을 때
그것은 어떤 현존,
그 현존의 여백이 우리의 여백과 맞닿으며,
심연을 건너오라고 우리를 부른다.
15 <고요 속에 머무른 채, 어디에나 현존하는 침묵에 좀 더 가까이 가는 일 말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 (R.S.토머스) 그러니 이제 고향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자.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침묵을 향하여!
1장 하나님과 분리됐다는 망상
<감각의 문을 깨끗이 닦는다면 만물의 무한한 본질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5장 분심의 수수께끼
114 분심의 수수께끼는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는 문과 관련된다. 관상기도를 훈련할 때 분심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별 문제가 안된다. 중요한 것은 분심의 내용이 아니라 분심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분심은 우리를 가르치고 단련시킬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첫째,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감정인가?
둘째, 어떤 생각과 감정이 나타나는가?
셋째, 이러한 생각과 감정의 본성은 무엇이며,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115 이성은 이런 수수께끼에 답할 수 없다. 내적 침묵만이 답할 수 있다.
세 가지 문을 통과하면서 경험하는 분심이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한다면 분심은 본분을 다 한 것이며, 이 때 문이 열릴 것이다.
우리가 진리와 자유와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다면, 분심은 문이 닫히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 첫 번째 문의 수수께끼 :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인가?
116 분심의 첫째 목적은 누구나 걸리는 영적인 덫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것이다. 덫이란 생각이나 감정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동일시할 경우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단지 반응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118 진정한 평화는 생각이나 감정을 비평하지 않고 고요하게 바라볼 때 맺히는 열매이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가 연마해야 할 기술이다.
119 첫 번째 문을 통과할 때 큰 인내심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의 의식에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면을 향할 때마다 우리는 마음의 수다와 생각과 비평을 만난다.
첫 번째 문의 수수께끼에 답하려면 기도 낱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20 낱말기도 수련이 성장하면 생각과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 두 번째 문의 수수께끼 : 어떤 생각과 감정이 나타나는가?
120 첫 번째 문에서 우리는 조건 반사적 반응에 완전히 지배 받지만, 그 문을 지나고 나면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훨씬 잘 알아차릴 수 있다. 내적 침묵이 열매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알아차림이 성장하는 것이다.
121 일어나고 있는 일의 희생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희생자에서 목격자로 변하는 것은 관상 여정 초기에 얻는 심리적 열매다.
알아차림은 침묵의 핵심이다. 두 번째 문의 수수께끼는 우리가 알아차리는 생각과 감정을 비평하지 않는 훈련을 통해 침묵이 더욱 깊어지는 과정을 도와준다.
122 관상의 대가 에바그리우스는 생각을 없애려 노력할수록 더 많은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생각이나 내적 수다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라고 한다. 비평하지 말고 단순히 관찰하라고 한다. "당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주시하라. 생각이 얼마나 강렬한지, 얼마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지 눈여겨보라. 그리고 생각이 나타났다고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라. 생각이 얼마나 복잡한지, 어떤 주기로 나타나는지, 악마들이 어떻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주목해서 보라. 그리고 생각이 나타나는 순서와 그 생각이 어떤 것을 연상시키는지 주시하라."
123 에바그리우스는 괴롭히는 생각을 속속들이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적절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분노, 두려움, 교만 등) 이름은 생각의 특징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낱말기도로 돌아가면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상기도가 자라면 순식간에 생각을 명명할 수 있다. 그러고는 기도 낱말로 부드럽게 돌아가거나, 사랑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냥 있는다.
- 세 번째 문의 수수께끼 : 생각과 감정의 본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132 세 번째 문을 통과할 때의 조언(무지의 구름) 분심이 성가시게 할 때 어꺠 너머로 보려고 하십시오. 말하자만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무언가는 바로 무지의 구름에 휩싸여 있는 하나님입니다.
133 이제 우리는 먹구름을 넘어가 세 번째 문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이 수수께끼의 목적은 생각과 감정의 본성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133 본성이라는 말은 생각과 감정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를 묻기 위해서다. 생각과 감정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실재하는가?
134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텅 빈 것이다. 주시하라.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134 세 번째 수수께끼가 풀릴 때 우리는 큰 해방감을 느낀다. 이는 강바닥이 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134-135 진정한 은총이란 우리 자신의 심층이 빛나는 광활함이라는 진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광활함 속에서 고통스러운 감정, 비난하고 판단하는 생각, 끝없이 이어지는 마음의 장난, 상처, 기쁨과 기억, 두려움과 분열된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135 물론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분노도 그렇다. 마음의 장난도 계속된다. 일시적 기쁨과 순간적 두려움도 모두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시온 산에 나타나 변덕을 부리는 날씨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135 우리가 시온 산이라는 것,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거룩한 산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 자신과 날씨를 동일시하는 망상의 사슬이 풀린다. ... 그런 생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요하고 자유롭다.
135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면 생각과 감정의 본성을 묻는 세 번째 수수께끼에 답한 것이다.
136 이제 우리는 관상의 진실을 분명히 이해한다. ... 에바그리우스는 평정심을 아는 사람들이 빛나는 광활함을 알아차린다고 한다. 평정심은 일상생활의 일을 바라볼 때도 지속된다. 평정심에 이른 알아차림이 모든 것의 바탕이고 모든 것을 관장하며, 모든 것과 하나다. 삶이 잘 흘러가든 지옥 같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
137 분심이라는 시련을 통해 우리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깨달음의 세가지 열매를 살펴보자. 1) 우리는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매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삶은 아주 단순해진다. 2) 오만 가지 생각의 흐름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문지방을 넘어가면, 우리는 삶의 긴장을 훨씬 더 잘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내면은 비좁은 공간이 아니라 깊고 광활한 골짜기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구름은 생겼다가 사라진다. 3) 우리는 거대한 흐름인 이러한 전체를 보는 것이 전체 그 자체라는 것을 안다. 생각과 감정이 실체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38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갈2:20) 그리스도는 문을 통과하게 하는 길이며, 동시에 문이다. (exit, gate,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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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희생자에서 목격자로
141 앞에서 우리는 몸의 역할, 기도낱말, 분심이라는 관상 수련의 세 가지 구성 요서가 작동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41 특히 고통스러운 감정과 씨름할 때 관상기도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또 씨름의 양상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1) 두려움으로 인한 마비
142 두려움은 은밀하게 퍼지면서 자신감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자기를 혐오하게도 한다.
142 (로라의 사례) 로라는 수도원에서 10년 정도 지냈을 무렵 두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에 있는 다른 수녀와 일반 규칙을 특정 상황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언쟁을 벌인 것이다. 둘은 공공연히 말다툼을 했고, 로라는 점점 불리해졌다.
143 갈등이 깊어지면서 두려움이 로라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삶에 뛰어들어 그녀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144 로라의 두려움은 칡넝쿨처럼 자랐다. 그 여자를 회피하는 것은 로라의 삶뿐 아니라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로가가 침대에서 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수도원장으 ㄴ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 두려움을 보는 관점의 전환
144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은 아주 멋진 영적 예술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며 생기를 얻을 것이다.
145 배리 레페즈의 <북극의 꿈>
에스키모에게 북극곰은 아주 위협적인 존재다. 그러나 북극곰은 에스키모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해주는 동물이기도 하며, 종교와 문화에서 중요하고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에스키모에게 북극곰을 정면으로대면하는 일은 통과의례이며,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일이다.
북극곰을 말하는 토나르수크라는 힘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북극곰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대면하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와 해후하는 것이다. 북극곰을 성공적으로 정면에서 마주했다면 당신은 결코 없앨 수 없는 어떤 것을 내면에서 발견한 것이며, 그런 다음 곰을 떠났다면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극지에서 생명을 보장받으려면 곰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극지에서의 삶은 곰이 주는 선물이다.
146 심리치료사는 로라에게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두려움 자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즉 곰이 주는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것이다.
146 로라는 심리치료사의 도움으로 두려움의 대상인 그 여자와 두려움 자체를 구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심리치료사는 로라에게 두려움에 이름을 붙여보라고 했다.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라는 프란시스를 바라보는 훈련을 꾸준히 했다. 프란시스가 조종하려고 할때마다, 운전석 옆자리로 가라고 프란시스에게 로라는 속삭였다.
147 로라는 영적 일지에 그날까지 보아온 프란시스의 본성이 어떠했는지 적곤했다. 로라는 두려움에 대한 경험과 두려움의 대상을 분리시키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147 이러한 기술은 고대 관상 수련과 동일한 것으로 에바그리스우스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바란다. 생각을 계속 조심스럽게 바라보라. 생각의 강도와 그것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관찰하고, 생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따라가라.
147 로라는 두려움의 가시에서 점점 벗어났다. 심리치료는 모두 끝났지만, 여정의 끝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로라에겐 더 깊은 해방이 필요했다.
148 로라는 관상기도를 새로운 마음으로 수련하기 시작했다. 호흡과 하나가 된 예수기도는 그녀의 심장에 뿌리를 내렸으면, 그곳이 바로 로라가 돌아갈 고향이었다. (헤지키오스의 책) 주의력은 마음이 침묵할 때 생긴다. 그것은 그 어떤 생각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 이 침묵 속에서 마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숨쉬면서 멈추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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