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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 이란 왕실 주치의 이영림 한의사
박준원 2025-08-10 추천 0 댓글 0 조회 6

이영림 한의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란에서 활동한 한국 출신의 한의사로, '골드 핑거(신이 내린 손가락)'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침술 실력과 진심 어린 치료로 이란 왕실과 고위층 환자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란에서의 활동과 명성

이영림 한의사는 1978년 이란을 방문하여 현지 병원에서 편두통 환자를 치료한 후, 이란 정부로부터 왕실 주치의로 초청받았습니다. 그는 타지리지 메디컬센터에서 18년간 근무하며, 침술만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특히, 이란인들의 고질병인 담궐두통을 효과적으로 치료하여 '골드 핑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진료 방식은 얼굴색과 걸음걸이, 맥진 등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으로, 환자들은 그의 치료를 받기 위해 1년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또한,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의 부인인 하쉐미 여사의 알레르기성 질환을 치료하며 깊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사업가로서의 활동

이영림 한의사는 의료 활동 외에도 현지 건설업에 투자하여 큰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는 '동남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한국 대형 건설회사가 700만 달러 규모의 공사를 수주할 때, 동남건설은 3000만 달러 규모의 공사를 수주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모교 경희대에 1300억 원 기부

귀국 후, 이영림 한의사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 13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하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기부는 대학 기부 역사상 최고 금액으로, 한의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저서 및 학문적 기여

이영림 한의사는 '백색혁명'이라는 책을 번역하여 이란에 소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국과 이란 간의 문화적 교류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골드 핑거: 신이 내린 한의사'라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공유하였습니다. 

 

조선일보 이동휘 기자 입력 2016.12.19. 03:03

"병(病)으로 사경을 헤매던 스물두 살 때 '완치되면 남은 생을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죠. 53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됐네요."

지난 16일 모교인 경희대에 충남 금산에 있는 부동산과 소장품 등 약 1300억원 상당의 기부를 약속한 이영림(여·75) 영림한의원장은 18일 본지 인터뷰에서 "죽기 전에 약속을 지켜 행복하다"고 했다. 개인이 대학에 기부한 금액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본지 17일자 A25면

이씨는 29세이던 지난 1970년 경희대 한의대에 '늦깎이'로 입학했다. 원래 스무 살 때 서울의 한 의대에 진학했지만 간(肝)디스토마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고 오랜 투병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키가 165㎝였던 이씨 몸무게가 42㎏까지 빠질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병원에서는 "곧 죽을 테니 마음의 준비나 하시라"며 치료를 포기했다고 한다.

모교 경희대에 1300억원 상당의 기부를 약속한 이영림 영림한의원장이 18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자신의 한의원에서 약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외국인 최초로 이란 왕실 주치의를 지내고,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한 이 원장은 “학교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 아직 갚을 빚이 많다”고 말했다.
모교 경희대에 1300억원 상당의 기부를 약속한 이영림 영림한의원장이 18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자신의 한의원에서 약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외국인 최초로 이란 왕실 주치의를 지내고,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한 이 원장은 “학교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 아직 갚을 빚이 많다”고 말했다.

앙상하게 야윈 딸이 부산 고향 집에 내려가자 어머니는 이씨를 끌고 한의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약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6남매 중 셋째인 이씨는 '안 그래도 어려운 집안 형편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혼자 이겨내고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월세방에 살며 12권짜리 백과사전을 짊어지고 방문 판매를 다녀 번 돈으로 약값을 댔다. 이렇게 7년간 한약을 먹으며 병을 이겨냈다. 그리고 투병 과정에서 한의학의 매력에 빠져 한의대에 진학했다.

기부 대상으로 모교를 선택한 것은 고학생(苦學生) 시절 자신을 아버지처럼 돌봐준 고(故) 신상주 경희대 한의대 교수 때문이었다. 프랑스 소르본대 출신으로 외국어를 잘했던 신 교수는 번역으로 가욋돈이 생기면 항상 고학생들을 불러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었다고 한다. 신 교수는 학비를 벌며 공부하느라 바빴던 이씨를 보면 항상 '어이, 도깨비'라고 불러세우고 따뜻한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씨는 "은사님께 배운 한의학과 가르침으로 이렇게 돈을 벌었으니 당연히 후배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내가 학교에 진 빚을 다 갚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한의사가 된 이씨는 1976년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주한 이란 대사의 어깨 통증을 깨끗이 치료해줬다. 그 인연으로 이란 팔레비 국왕의 저서 '백색혁명'을 은사인 신 교수와 함께 번역했다.

번역본이 나온 뒤 이씨는 이란 정부의 초청을 받고 이란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씨는 편두통을 앓던 이란 왕실 병원장에게 침을 놔줘 완치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란 국왕이 왕실 병원장에게 특명(特命)을 내려 이씨를 왕실 병원에서 근무하게 했다. 원래 한 달만 있다 돌아오려고 했던 이씨의 이란 생활은 1994년 귀국 때까지 18년간 이어졌다. 왕실 주치의로 일하던 그는 1979년 이란혁명 이후에는 대통령 주치의로 일하며 이란 고위 관료들과 시민들을 하루 100여 명씩 진료했다. 이씨는 "내가 맥을 짚은 이란 사람만 수십만명"이라며 "침으로 병을 고쳐주니 이란 국민이 나를 '황금 손가락'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씨는 한의사뿐 아니라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이란 현지에 건설 회사를 세운 뒤 2000㎞가 넘는 고압선 설치 공사를 따내 지금의 부(富)를 일궜다.

이씨는 기부를 결심할 때 고향 집 대문을 열어두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고 했다. 가세(家勢)가 기울기 전 그의 할머니는 춘궁기 때마다 매일 집 대문을 열어두고 항아리에 쌀을 담아뒀다고 한다. 끼니를 못 잇는 마을 사람들이 쌀을 한 그릇씩 퍼 가도록 한 것이다. 이씨는 "전 재산을 기부해 미국 기부 문화의 효시(嚆矢)가 된 철강왕 카네기가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남은 인생 더 나누며 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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