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춘선 목사님의 어록
최춘선 할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씀.
절대자의 섭리라고 느껴지는 기적같은 만남에 의해 잊혀질뻔 했던 한 노인의 기록이 생생한 영상으로 남았다.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여 30년이 넘도록 맨발로 걸어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던 최춘선 할아버지. 그가 행했던 수많은 자선과 독특한 복음전도의 자취가 따스하게 보존되어 인터넷을 통해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광인의 모습을 한 그를 알고보니 김구 주석과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애국지사요, 젊은 시절 일본에서 공부한 선각자였다. '우치무라 간조'하면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했던 신학자요, 동경대 총장등 수많은 지성을 배출하고 우리나라의 김교신, 함석헌에게 영향을 끼쳤던 인물.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최춘선 할아버지는 빈민선교의 대부인 실천주의 목회자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세례를 받았다. 5개국어를 구사하고, 5남매를 교육가로 키운 할아버지의 남다른 이력은 엄청난 부자이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삶으로 집약된다. 수만평의 땅을 월남한 이북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 삼십여년간 나환자를 돕는 일을 포함해서 매일 만원어치의 빵을 사서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던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 동네 꼬마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따뜻한 할아버지는 "효자는 대통령보다 성공이요, 효자는 대학총장보다 성공이요.."라며 아이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평양에도 북경에도 전도지를 붙여야 할텐데..." 염원하던 통일을 보지 못하셨지만, 그가 남긴 이 영상은 말로만 통일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했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더욱 담대합니다" 고독을 넘어 외로운 증인으로 살았던 할아버지는 2001년 9월, 그의 삶의 공간이었던 지하철 1호선 의자에 앉은 채 주님 곁으로 갔다.
제2 애국지사묘역 906호, 애국지사 고(故) 최춘선의 묘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후손들의 글이 남겨져 있다.
“맨발의 성자, 만교 최춘선 목사(1920.12.25-2001.09.08)”라는 표현이 확인됩니다
1. 초기 삶과 신앙의 형성
부유한 가정과 일본 유학
최춘선 목사님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의 저명한 크리스천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와 그의 제자인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로부터 깊은 신앙과 ‘조선산 기독교’ 정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2.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김구 선생과의 동행
젊은 시절, 그는 독립운동 지도자 김구 선생과 함께 광복군의 활동에 참여한 독립투사였습니다
국립묘지 애국지사 안장
그의 묘비명에는 “일제 치하 암흑기에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광복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 애쓰신 맨발의 전도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그가 독립운동을 했음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표식입니다
3. 광복 이후 – 맨발 전도를 통한 헌신
무소유의 삶과 나눔
독립 이후 그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헐벗은 자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땅과 집은 물론, 나환자와 걸인들에게 매일 밥과 빵을 제공하는 헌신적인 삶이었지요
맨발 전도
그의 전도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강렬했습니다. 30년 넘게 신발 없이 거리와 지하철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고, 이로 인해 거리의 이방인이나 미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4. 다큐멘터리와 후대에 끼친 영향
김우현 감독의 기록
김우현 감독은 우연히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 결과물이 다큐멘터리와 책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출간되어 큰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일본 유학 시기 및 배경
와세다 대학 유학
최춘선 목사님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젊은 시절 일본 도쿄에 있는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와 가가와 도요히코로부터 깊은 신앙과 ‘조선산 기독교’ 정신을 배우셨습니다
언어와 학력
유학을 통해 학문적으로 성장하셨고, 다섯 개 국어에 능통하셨다고 전해져 그의 지적 깊이가 매우 인상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독립운동 활동
광복군 독립투사 활동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징용을 거부하시고 만주로 떠나셨습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광복군 섭외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김구 선생과의 동행
젊은 시절에는 김구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시며 만주와 상해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셨습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셨습니다
보상 거부 의지
독립유공자 등록 이후에도 아드님 전해진 회고에 따르면, 연금이나 학비 면제 등의 혜택을 거부하셨습니다. 이는 "남과 북이 아직 분단된 상태이고,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념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하정완의 영화칼럼] 팔복1-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만일 우리가 지하철에서 맨발 모습으로 극성스럽게 느껴지는 “예수 천당”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최춘선 할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두말할 것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처럼 정신나간 광신자 정도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꼭 저렇게 전도해야하나?”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1995년 7월부터 시작된 영상일기가 2001년 9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까지 김우현감독의 카메라에 하나씩 드러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진실들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입니다. 할아버지는 단순히 정신나간 노숙자나 지나친 광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드러난 최춘선 할아버지의 이력을 아는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70년대 자가용 5대를 소유한 재력가, 김포일대의 땅이 모두 할아버지의 소유,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 유학, 5개국어에 능통,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 최춘선 할아버지 직업은 목사, 아들도 목사 최바울,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
참 기막힌 이력입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재력과 학력 그리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던 멋있는 목사였습니다. 더욱이 아들 최바울 목사는 “아버님이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저희들은 대학까지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신청을 안 하셨어요. 남과 북이 아직 분단된 상태이므로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고,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라고 술회합니다. 진정한 독립운동가이셨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최춘선할아버지가 전도할 때 안중근, 유관순열사를 인용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신발을 신지않고 맨발로 다니시는 이유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최춘선 할아버지를 이렇게 살게 한 것일까요? 김우현감독과의 대화 중에 최춘선 할아버지는 벽에 걸린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라는 말씀과 함께 “내 몸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아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22세에 부름받고 주님 따르는 가운데 있지만 너무 너무 불충성 불순종에 진짜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도로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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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의 성자 최춘선 할아버지 | |
최춘선 할아버지가 이렇게 산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본 것이, 그가 안 것이 그의 삶을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정말 예수의 사랑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경험한 그는 가장 큰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표준새번역/빌3:8-9)
사실 조금만 더 살펴보면 성경에는 최춘선 할아버지와 같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있었고, 세례 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노숙하였었습니다. 호세아는 창녀가 된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다녀야 할만큼 비참하였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행동하는 광야의 연극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산 것은 보았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고 들었고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문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도취되어서, 그것을 추구하느라고 정말 진리를 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마치 쥐덫에 걸린 것도 모르고 쥐덫속에서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고급 치즈와 고기 그리고 과자부스러기를 먹고 있으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이 지금 문제인 것입니다. 보지 못하니까 가짜와 허구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우리가 불쌍한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한계적 운명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쥐덫에 갇혀 거기있는 음식들을 한쪽으로 숨겨놓으려고 하는 쥐에 불과한 신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물질과 세상의 노예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답답한 세상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삶은 보지 못한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더라도 진리를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끊임없이 불태웠고, 그 사랑에 이끌려 고난의 길을 걸었다. 최춘선 목사님이 30년의 긴 세월 동안 추우나 더우나 맨발로 다니며 온갖 핍박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전도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신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천하신 후 장남 최바울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최춘선 목사님의 거룩하게 구별된 삶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말씀대로 살다간 아버지
아버지가 소천 후에 그에게 깊게 다가온 말씀은 이사야 55:8절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그는 비로소 고백했다.
“저는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유튜브에 있는 아버지의 동영상, 아버지의 발을 볼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제가 천국에 가서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 미안해요. 제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얼마나 힘든 길이었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치광이라고 하고, 조롱한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을까?
제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덕분에 멋진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7살 즈음 어느 날, 아버지가 전도용 괘도를 가지고 노방전도를 나가셨다. 그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아버지는 버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나셨다. 어린 마음에 버스에서 쫓겨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원래 상당한 부자였다. 김포공항 옆 5만평의 땅을 소유했고, 60년대에 자가용이 5대였고, 집안까지 들어가려면 정문에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깨닫고 나서 말씀 그대로 다 나누어 주셨다. 땅을 떼어 주고 떼어 주다보니 땅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동네가 형성이 되었고, 학교와 농장과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아버지는 하루에 와이셔츠를 서너 번 갈아입으실 정도로 멋쟁이셨다. 옛날 조부님이 중국 북경에서 무역을 하셨는데 아파트가 3채가 아니라 3동을 소유하실 정도로 부자였다. 아버지는 5개 국어를 하셨는데, 옛날 미국 선교사가 부흥회에서 증거 할 때 통역을 하기도 하셨다. 어린 시절 물질이 차고 넘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말씀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무서웠다. 진짜 성경 말씀대로 사셨기 때문이다. 두 벌 옷을 갖지 말라고 하니까 그대로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사신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느 날 내 잠바가 없어졌다.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추위에 떠는 어떤 아이에게 주신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길거리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해서 양로원, 고아원이 시작되었고, 우리들도 고아처럼 키우셨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이셨다.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화가 난다.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그 시절에는 이가 많아서 위생상 모두 그렇게 했다. ‘다른 고아원 원장들은 돈도 많이 벌고 그 자녀들이 호의호식한다는데 왜 우리 집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다. 고등학생 때 엄마는 자궁암으로 누워계시고 아버지는 전도한다고 나가셨을 때 동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우리 절대 예수 믿지 말자. 아버지가 예수에게 미쳐서 저렇게 사시니 우리는 절대 믿지 말자.”라고 했다.
모든 것을 나눠주고 남은 땅까지 빼앗기고 난 후 고아들과 이사를 다녔다. 여기저기서 쫓겨났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삿짐센터 차가 예정보다 일찍 와서 밥도 못 먹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날따라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트럭 뒤에 아버지와 나와 남동생이 타고 가는데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아버지는 찬송을 부르시는 것이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나 가까이 해!
나는 싫어. 우리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는 예수가 나는 싫어!’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부인할수록 예수님이 더욱 다가오셨다. 나는 나중에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점차 아버지처럼 살고픈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2001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원망과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꼭 저렇게 목회를 하고, 저렇게 전도를 해야 하나? 합리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꼭 저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해야 하나? 미치광이 소리 듣고, 전철에서 끌려 나오시고….’
유튜브 동영상에 아버지께서 목발 짚으신 모습이 나온다. 아버지는 평소 목발을 짚지 않으셨는데 버스 기사에게 쫓겨나면서 땅바닥에 떨어져 고관절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걷지도 못하시는 분이 전도하러 나가실 때 아들로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삶은 외롭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역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역이었지만 당신의 사명이었기에 그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다가 가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
진정한 성공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하실 때 그것이 성공적인 삶인 줄 믿는다. 나는 아버지의 영상이 인터넷에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친구들이 아버지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고 말해주어서 비로소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 맨발의 모습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동영상에 있었다.
나는 거기에 댓글을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춘선 할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울면서 장문의 글을 썼다. 그런데 마지막에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글이 다 날아가 버렸다. 어느 날 김우현 감독님이 찾아와서 장남인 나와 막내 동생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날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내 막내 동생은 다루기 힘든 녀석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반발심을 가지고 방황을 많이 한 동생이었다. 그 녀석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아무 것도 물려주시지 않은 것 같았는데 제게 남겨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남기신 찬송가 책갈피에 2천원이 있어서 ‘내게 남기신 유산이 2천원이구나!’라고 여겼는데 ‘아버지께서 막내에게 무슨 귀중한 것을 남기셨나?’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내 가슴 깊은 곳에 예수님을 박아놓고 가셨습니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께서 우리를 방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보다 더 잘 키우실 수 있는 예수님께 우리를 위탁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5남매에게 내려주신 축복을 다 표현하기 어렵다. 아버지의 기도와 아버지의 헌신과 위탁으로 차고 넘치는 복을 받았다.
살면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은 “바울아? 너희 아버지는 왜 맨발로 다니시니?”였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들었던 그 질문에 단 한 번도 명쾌하게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몰랐기에 대답도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지요.”
| 요셉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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