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민족대표 33인 신석구 목사와 정춘수 목사 이야기>
- 의기는 얼음같아서 추우면 더욱 굳어지고 도심은 쇠같아서 연단하면 더욱 정련되네 -
신석구는(1875-1950) 충북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나 엄격한 유교 가풍 속에서 자라 22세 때 결혼하였다. 고향친구 김진우와 전당포 사업을 하다 파산하여 수감되기도 하였다. 31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우연히 김진우를 다시 만나 전도를 받고 성경을 읽다가 개종하여 고랑포교회에 출석을 하였다.(1907)
그 무렵 고랑포교회를 방문한 고향친구 정춘수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정춘수는 신석구와 같은 해 가까운 마을인 청주 회원면 두산리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구국운동에 헌신하고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원산으로 가는데, 거기서 여관집 주인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4년 하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906년 개성북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하고 있었다.
이후 신석구는 정춘수의 권유로 개성에 가서 리드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어학선생을 했다. 그리고 1908년 왓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협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남감리회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어려운 형편으로 졸업은 14년 만인 1922년에 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친구 오화영 목사로부터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목회자의 정치참여와 타종교와의 연합 등 여러 문제로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33인 중 가장 늦게 참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식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 8개월 동안 수감되어 고난을 겪다가 1921년에 출옥을 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의 핍박이 절정을 달할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신석구 목사도 수시로 조사를 받았다. 반면, 정춘수 목사는 감리교 감독이 된 이후 1941년 혁신교단을 만들어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목사를 교사라 부르며, 감리교 연회를 해산하고 교구를 만들었다. 총독부 징병제도 실시에 동조하는 공시문을 발표하였다. 일본어로 설교할 것과 구약과 계시록을 읽지 말 것, 찬송가에 전쟁, 평화, 메시야, 재림에 관한 내용을 삭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국방헌금을 실시하고 전국 34개 교회를 폐쇄하고 그 부동산을 매각하여 전투기 3대를 헌납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노골적인 친일 정책에 협조하는 않는 목회자들은 제명, 출교, 퇴직 처분을 하였다.
친구의 변절을 참다 못한 신석구는 1944년 여름, 소고기 두 근을 들고 정춘수의 집을 찾아갔지만, 친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해방 후 정춘수는 친일파로 지탄을 받다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되었다. 그는 끊임없는 비난 속에 천주교로 개종하겠다고 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변명만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1951년 고향에서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해방을 용강경찰서에서 맞이하였다. 유사리교회를 지키기 위해 북쪽에 남았던 신석구는 1949년 진남포4.19사건에 연루되어 10년형을 선고 받고 인민교화소에 수감된 후 1950년 총살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는 76세의 나이로 순교할 때까지 감리교 목사로 독립운동가로 믿음을 지키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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