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누기

  • 커뮤니티 >
  • 생각나누기
민족대표 33인 신석구 목사
박준원 2024-08-11 추천 1 댓글 0 조회 31

독립을 심으러 가노라/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


"의기는 얼음같아서 추우면 더욱 굳어지고(義氣若氷 寒益固)

도심은 쇠같아서 연단하면 더욱 정련되네(道心如鐵 鍊尤精)"


신석구 목사님이 옥중에서 지은 한시(漢詩)의 한 구절이다. 이 시구는 온 몸과 마음을 민족과 신앙의 제단에 바쳐 고난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키신 목사님의 생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다.

신석구 목사는 187553일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에서 유학자 신재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필 자서전에 의하면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5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어 '학업도 이루지 못하고 가산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학자이신 아버지로부터 엄한 유교 교육을 받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여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면서도 도박이나 잡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23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27세 때 김진우(金鎭宇)라는 친구와 함께 전당포를 하였으나 32세 때 사업에 실패하여 친구 대신 감옥살이를 하고,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도피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한 때 윤도사 집에서 그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김진우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그 일을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경기도 고랑포에 내려가 약국을 차려 운영하였다. 이 무렵 그 친구는 서울에 있을 때 예수를 믿게 되어 신석구에게도 믿기를 권하고 이웃 교회의 전도인들도 자주 찾아와 권면해도 그는 3년동안 교회에 구경조차 가지 않고 거절하였다. 그가 어려서 배운 유교의 관습에 젖어 유교 이외의 것은 모두 이단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인지라 그도 마음에 의분을 느끼고 한 때는 의병을 일으켜 볼까도 생각하였으나 의병으로써는 무고한 생명만 희생할 뿐 구국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였으며, 올바른 종교로 국민을 교화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구국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그가 생각한 올바른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었다.

그 때 마침 전도인이 전도를 하면서 성경 한 권을 사라고 권하였다. 그는 전도인과 변론하다가 성경을 사서보고 철저히 반대하리라 생각하고 성경을 사서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기독교가 유교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해주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참으로 나라를 구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1907714일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그후 순회 전도인 정춘수의 권유로 개성에 가서 미국인 의료 선교사 리드(W. T. Reid, 李慰萬)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1908329일 개성남부예배당에서 왓슨(A. W. Wasson, 王永德)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되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기도하는 가운데 전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해 4월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092월부터 개성북부교회 크램(W. G. Cram, 奇義男) 선교사 밑에서 전도인으로 활약하다가 같은 해 5월에는 권사직도 받게 되었다. 191010월에는 홍천구역으로 전임되었으며, 그후 가평, 춘천지역의 순회전도사를 거쳐 1917924일 원산연회에서 집사목사의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11월에는 서울 수표교교회로 전임하였는데 바로 이 교회에 있으면서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그 때의 일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오화영 목사가 1919212,3일경에 만나 나보고 말하기를 모모처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천도교측과 연합코저 하니 거기 참가하겠느냐 하는데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키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여 즉시 대답지 아니하고 좀 생각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4천년 저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아니하였다.

예수 말씀하기시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국들 수 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는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어느 형제가 나에게 말하기를 어떤 선생님께 말한 즉 그 선생님 말씀이 시기상조라 합니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함이 아니오 독립을 심으려 들어가노라 하였다. 그 날 모두가 곧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는 날인데 마침 오화영 목사를 만나 나의 뜻을 표명하고 곧 참가하였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적 결단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의 씨를 심으려 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제 검사의 "장래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 일로 5개월간의 독방생활을 포함하여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1921114일에 출옥한 원산남중앙교회를 담임하였다가 이듬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92일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후 고성구역장, 가평구역장, 철원구역장, 한포구역장 등을 거쳐 이안지방 감리사를 지내고 19355월에 천안지방 감리사로 파송받아 천안교회를 담임하였다. 이 천안교회에서 목회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검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1939년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는 감리교단이 일제의 압력에 순응하여 '혁신조항'을 발표하자 이에 항변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저항적 태도 때문에 19444월에는 친일적인 교단 본부로부터 면직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이 붙들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해방 직전인 19455월 일제는 신석구 목사를 '전승기원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고하여 용강경찰서에 구금하였다가 해방이 되서야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공산정권 하에서 시련은 계속되었다. 해방직후 잠시 유사리교회를 담임하다가 진남포 광량만교회로 전임하였다. 194631절에 기념방송을 북한 당국이 요구하는대로 하지 않아 정치보위부에 피검되었다가 풀려났고,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설립에 대한 감상문을 쓰라고 요구받자 솔직하고 비판적인 감상문을 써서 북한정권의 미움을 샀다.

주위에서 월남하자는 권고도 있었으나 양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하여 그곳에 남아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19466월에는 감리교 서부연회 연회장을 지내고 19474월부터 진남포지방 문애리교회를 담임하던 중 기독교민주당사건으로 피검되었으며, 다시 1949419일 북한 당국인 조작한 이른바 '진남포 4.19사건'으로 구속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 복역 중 1950625전란이 일어나 그해 1010일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민족 분단과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몸소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20018매분, 1996. 7. 2)

[출처] 독립을 심으러 가노라/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작성자 농심곰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민족대표 33인, 신석구 목사와 정춘수 목사 이야기 박준원 2024.08.11 1 32
다음글 신영복선생님의 담론(1) 박준원 2024.01.28 1 81

51161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도계로95번길 6-10 (도계동) TEL : 055-277-9940 지도보기

Copyright © 한교회 ;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24
  • Total164,155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