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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선생님의 담론(1)
박준원 2024-01-28 추천 1 댓글 0 조회 81

1. 가장 먼 여행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공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것은 가슴 뭉클한 위로가 됩니다. 또한, 우리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소외 구조 속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소외 구조에 저항하는 것이 소통이며, 소통은 소외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였습니다. 삼국지 한권을 세명의 친구가 함께 읽었습니다. 하필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갔다 달려왔습니다. 나 없는 사이 한참 읽어 나가겠다고 생각하면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웬일로 두 친구가 책을 읽기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 안읽어?' '관운장 죽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관운장이 죽자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에 관운장이 죽다니! 어린 우리는 참으로 슬펐습니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지금도 삼국지의 절정은 관운장의 죽음입니다. '함께'는 뜨거운 공감입니다. 


함께는 지혜입니다. 영국의 과학자이며 우생학자였던 골턴이 여행 중 시골의 가축품평회 행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행사에서 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표를 사서 자기가 생각하는 소의 무게를 적어서 투표함에 넣는 것입니다. 가장 근접한 무게를 써 넣은 사람에게 소를 상품으로 주는 행사였습니다. 정확하게 맞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800개의 표의 무게를 평균했더니 542.9kg이었습니다. 실제로 측정한 소의 무게는 543.4kg이었습니다. 군중을 한 사람으로 보면 완벽한 판단력있습니다. 개인은 틀릴 수 있지만, 집단의 지적능력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라고 했습니다. 구도에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대체로 고전 공부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고전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어느 시대이든 공부는 당대의 문맥을 뛰어넘는 탈문맥의 창조적 실천입니다. 


<머리-가슴-발>은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순서입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니체는 또한 중세인들은 알코올로 견뎠다고 했습니다. 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공부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생각은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입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입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발은 삶의 현장을 뜻합니다. 애정과 공감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심부는 기존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뿐 창조 공간이 못 됩니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변방의 의미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방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변방이 창조 곤강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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