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가족반) 1막1장 영원히 행복하신 하나님
- 박준원 2025.4.1 조회 36
-
<새가족반> (이정규 목사, 시광교회)
1막 가족으로의 초대
1장 영원히 행복하신 하나님
인간은 사랑 안에서만 행복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행복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을 사랑해 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게 '예스'라고 말할 때,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내 손가락을 잡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 만족감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인간은 사랑할 때 만족을 느낍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사랑은 존재를 지탱하게 해주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첫째 딸이 태어났을 때 저희 부부는 직장 생활 내의 긴장과 격무, 야근을 버텨낼 거대한 힘을 얻었습니다. 단순한 책임감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책임감 역시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을 잃은 사람들은 존재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며 고독감과 외로움, 고통을 느낍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은 사랑 안에서만 행복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을 만드신 분이 본질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랑이 그토록 중요하듯, 그들을 만드신 분께도 사랑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
1) 사랑이신 하나님
사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표현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을 그저 무기력하면서 착해 보이는, 좀 바보스러운 할아버지같이 상상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이 무슨 죄를 짓든 무엇을 믿든 벌하지도 않고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분은 정의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정의로우시며, 때로는 진노하시는 분이시기까지 합니다.
영국의 기독교 작가인 C.S. 루이스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해서 사랑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며, '사랑은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정의로우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아주 독특하고 중요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고 할 때와 같이 단지 하나님의 또 다른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펼치시는 행동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가장 중요한 본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 전 곧 이 세상 그 무엇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사랑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만 홀로 존재하셨는데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신학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요한의 말을 묵상해 왔습니다.
18세기 미국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일서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 이상의 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 사랑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영원하고도 필연적으로 사랑의 대상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랑은 다른 존재 곧 사랑받는 존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존재할 때도 하나님은이 사랑하는 대상은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요? 다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세 전 곧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셨으며,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시기 시작하실 때 그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기쁨과 사랑이 폭포수같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4:31)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누리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을 기뻐하시고, 또한 아버지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순종하셨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은 지극히 서로를 사랑하며 기뻐했습니다. 우주와 지구와 인간과 천사가 존재하지 않을 때, 즉 하나님 외에 아무 존재도 없을 때도, 하나님은 사랑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2)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는 분이었다는 사실이 좀 이해가 되시나요? 하지만 어딘가 헷갈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신 것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완전히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대단히 신비로운 방식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없는 아주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녀 보신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서 아버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즉 아버지라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1: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벧전1:3)
그렇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부 하나님께서 혼자 계시다가 심심해서 예수님을 만드셨다는 의미일까요? 성부 하나님은 계신데, 성자는 계시지 않던 때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요1:2) 게다가 예수님 역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2:13)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한 우리 육체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며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어떤 존재야야 하는지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부를 때, 이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부자 관계에 빗대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신 이유는, 그분이 사랑의 원천이요 샘이며 출발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자 곧 아들이신 이유는, 그분이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며 또한 성부의 사랑을 받아 기쁨으로 성부께 돌려드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시지만, 성경은 대체로 성부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성자를 사랑을 받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등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사랑의 출발과 근원이 되시며, 성자는 받는 사랑을 기뻐하시고 반응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성부와 성자는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십니다.
3) 성령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또한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실 때, 항상 성령 하나님을 보내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특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께서는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기쁨의 외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성부께서 성자 하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비둘기처럼,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내려오셔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성부께서 성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주시는 선물이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생애 내내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1:18)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님을 육체로 나게 하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으며(눅4:1),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눅10:21)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신 것은 무엇이나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도 모두 성령님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놀라운 능력과 권위를 느꼈는데(마7:29), 이는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음 당하실 때도 성령께서는 함께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때 성령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예수님을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히9:14) 분으로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령님은 함께하심으로 능력과 힘을 공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나서 사흘 만에 성령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성령님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롬8:11)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1:4)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일으키신 사건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성령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4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성령님이라는 '사랑의 끈으로 서로의 하나됨을 유지하십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마12:18)라고 말씀하십니다.
4) 사랑으로 인한 기쁨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태초부터 성부께서는 사랑의 출발이자 원천으로, 성자께서는 사랑받는 분이신 동시에 기쁨으로 사랑을 돌려드리시는 분으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 가운데 사랑의 끈이요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초에 아무것도 없을 때도 사랑이셨으며 늘 사랑이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본질적으로 행복하신 분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본래 사랑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는 기쁨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기쁠까요? 당연히 기쁠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에는 어떤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를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행복한 분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사랑의 대상이 존재해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정서적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무기력만을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물이라도 사랑하는 대상을 두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나 돈을 사랑하고 취미나 게임 같은 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살아 있음과 생명력과 열정을 느끼며 행복해합니다.
2단계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채워지지 못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사랑으로 반응할 떄, 인간은 정말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청혼을 허락받았다면 그 남성은 세상을 다 가진 것같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단계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유지되지 못하면 우리는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사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권태기가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한하다면, 그 대상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무한히 유지된다면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4단계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공동체 안에서 정착되어야 합니다. 결혼할 때 양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친구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랑이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5) 사랑으로 행복하신 삼위 하나님
사랑의 4단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단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부 하나님의 무한한 행복은 그분의 아들을 향한 기쁨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창세 전부터 날마다 그분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 대상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하나님만큼 탁월하고 아름다우십니다. 아들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단계 사랑을 받으시는 아들 역시 성부 하나님을 즐거이 영원토록 기뻐하시며 사랑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4:31)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랑도 무한한 성부의 사랑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3단계 성부와 성자의 사랑은 중단되거나 멈추는 사랑이 아니라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한 영원하신 분께서 다른 영원하신 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식지 않는 영원한 열정으로 불타오릅니다. 이러한 열정은 성부와 성자 가운데 무한하고 영원히 지속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행복도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4단계 무엇보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은 성령님의 함께하심으로 공동체적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은 편협한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함께하심으로 흘러넘치는 사랑입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지만,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만의 사랑의 끈이 아닙니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의 이 영원한 사랑을 창조물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롬5:5) 따라서 성부와 성자의 무한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자기 백성 모두에게 베푸시고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기에 무한하게 행복하신 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고 말씀합니다.(딤전6:15) 여기서 하나님이 복되시다고 번역된 그리스어 마카리오스는 행복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복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시라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제한 없이 분출되는 탁월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터져 나오는 기쁨은 무한함 그 이상일 것입니다.
인간이 오직 사랑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셨고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을 닮도록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작게는 두 명, 크게는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됨을 누리며 행복을 추구합니다.
6) 왜 이것을 알아야 하는가?
이제까지 배운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고, 영원 전부터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오직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사랑이실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해서, 삼위 하나님은 영원토록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것을 알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행복하신 분이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존 파이퍼는 하나님이 행복하시다는 이 진리가 우리에게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면서 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불행한 하나님과 영원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불행하신 분이라면 복음의 목적 역시 행복일 수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결국 기쁜 소식인 복음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라고 말씀하시며 행복한 하나님과 영원의 시간을 보내도록 초청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이(식당주인, 택시운전사, 택배기사 등등) 불행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함께해야 하는 절친, 가족, 배우자가 불행하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늘 불행하고 우울하다면, 그들과 함께하는 긴 시간이 당신에게는 불행한 시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친구와 동료, 가족과 배우자는 당신이 심지어 우울할 때에도 기쁨과 만족이 되어 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토록 기쁘고 즐거운 분이시고, 그분의 기쁨은 유한하거나 바뀌거나 중지시킬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서로를 만족하고 사랑하시며, 세 분이시지만 사랑으로 오나전한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듯 행복한 하나님과 영원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을 우리의 친구이자 남편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진행할 새가족반은 바로 이 하나님이 누리는 행복을 알고 그분의 행복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영원토록 사랑으로 행복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행복하신 분이라는 이 복음을 기뻐하도록 합시다!
<나눔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떠한가요?
2. 요한복음17:24에 보면, 창세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3. 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 성자 하나님을 '아들'이라 부릅니까?
4.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에서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고후13:13)
5.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으로 행복하실 수 있었습니까? 네 단계로 설명해 봅시다.
6.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영원토록 행복하신 분임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1장에서 우리는 세 위격으로 계시지만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이 교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그리스도인도 비교적 어렵게 느끼는 성경의 가르침이지만,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며 또한 우리의 구원에서 필수적인 지식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음 4가지로 삼위일체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가 하나님이신 것은 자연스레 알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2:13)
-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성령님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5장3절은 '성령을 속였다고'고 말하고 4절은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어떤 힘이나 능력,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자주 오해하는데, 성령님 역시 인격을 가진 분이시며, 우리의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이십니다.
2)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도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도 성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면 마치 한 존재가 보기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변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어떤 남자가 아버지에게는 아들이고 자녀에게는 아버지이며 아내에게는 남편인 것처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실 때는 성부,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성자, 우리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양태론적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고,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내려오셔시며, 성부께서는 기쁜 소리를 내십니다. 삼위는 각각 존재하시며, 한 존재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앙태론이 진리라면,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3) 세 위격은 모두 동등하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위격이 다른 위격보다 더 낮거나 종속되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여기서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게 등장하십니다.
아래에 대한 설명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컴퓨터는 모니터, 키보드, 본체 이렇게 셋이 합해서 한 컴퓨터입니다. 그러한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도 한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합체 로봇처럼 이해하는 것인데 이 설명도 문제가 있습니다. 키보드만으로 컴퓨터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완전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럼에도 불하하고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말해야 합니다 .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양태론을 피하기 위해 서로 다른 신성이나 본질을 가진 세 신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삼신론이라는 이단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신비가 시작됩니다.
네 가지 명제로 삼위일체를 설명했고, 이 정의들을 통해 이단을 피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비유는 비유를 드는 즉시 이단에 빠져 버립니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그것이 신비스럽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다 알 수 있다면 믿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왜 성경은, 정확히 하나님께서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더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이클 리브스라는 영국 신학자는 '사랑할 대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단일 위격이시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고 서로 사랑하심으로 하나이십니다. 여기에는 이해하지 못할 사랑의 신비가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누릴수록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