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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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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와 종말론에 대해서
박준원 2025.3.25 조회 36

<신학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라스


17장 기독교와 세계종교


<미르체아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

엘리아데는(루마니아, 197-1986) 체계적인 종교 연구로 종교 문화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신화와 신비 체험의 역할을 깊이 다루었다. 통과의례에(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구별짓는 예식들 탄생, 성인식, 죽음 등) 의한 그의 분석은 인류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원회귀의 신화1949, 성과 속1959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이 '성스러운 것'의 개념이다. 성스러운 것이 의미와 가치, 힘 존재의 원천이라고 본다. 성스러운 것은 큰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엘리아데의 이 개념은 루돌프 오토(독일, 1869-1937)는 거룩한 것의 경험은 신비로운 것이며,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개념과 아주 유사하다.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관점에서 논한 '성스러운' 것과도 유사하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것이 실재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성스러운 것은 인간 의식의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현상적 실체(나무 등)는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이 적절한 준비만 되어 있다면 신성현현(성스러운 것의 계시)으로 파악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나무지만 그 나무를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신성한 것의 계시가 될 수 있다. (경험에 의해 결정) 신성한 것이 일정 부분 사회적 산물이요, 보편적이고 개관적인 관념이 아니라 경험자의 역사에 의해 규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엘리아데가 '신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신화'는 진리와 실재의 문제를 다루는 특별한 유형의 이야기로서, 삶의 심오한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역사적 실재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훨씬 능가한다.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임과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인 <그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간접적으로 답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진리를 지니고 있는 신화는 신성현현, 곧 성스러운 계시가 될 수 있다. 신화는 성스러운 역사를 말해준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신화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성스러운 것은 인간 본성의 보편적 특성이며, 종교는 이것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구체화한다. 그는, 우리는 성스러운 것을 제거하나 합리적으로 해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밝혀주고 인간의 깊은 열망에 빛을 비추어 주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 인간의 고안물인 종교>

이 이론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관계가 있다. 이 이론은 종교를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요, 하나님에 맞서는 도전행위로 본다. 여기서는 종교를 인간의 편에서 위를 향해 하나님을 찾는 일로 이해한다. 종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완전히 대립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종교가 인간의 조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바르트는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신학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문화 개신교는 인간의 종교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바르트는 1916<하나님의 의>라는 강연에서 인간의 종교성을 바벨탑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인간이 세운 구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신앙'에 이르고 하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탐구는 '종교'를 낳는 것으로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바르트는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계열에 속한 종교 비판을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비판들이 인간의 고안물인 종교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한 할 장애물이 종교다. 최악의 경우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고안물을 예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상숭배가 된다.

사람들은 바르트의 종교관을 종교의 철폐라고 정의한다. <교회 교의학> 1217항 표제에 대한 표준 번역이 '종교 철폐로서의 하나님 계시이다. 이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신중한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어 철폐 Aufhubung는 독일 철학 전통에서 헤겔주의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이다. 이 말의 기본의미는 제거하다, 지양하다는 두 의미이다.

바르트 초기 저술에서는 종교를 인간의 고안물로 보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여기서 바르트가 하려고 한 일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들을 세우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타종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종교 일반을 비판하였다. 바르트는 기독교 안에서도 종교 현상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사회 문화의 가치들이 복음 속에 침투하여 복음과 혼합된다. 이러한 것을 우려한 바르트의 태도는 1930년대 독일 교회의 투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독일의 이념들이 기독교 신앙과 혼합되었다고 보았다. 후기에 바르트의 태도는 부드러워졌다. 점차 종교의 필요성을 현세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게되었다. 점차 종교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 예배의 형식들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갔다.

바르트는 종교가 신앙에 필요한 버팀목으로 세상이 끝날때까지 존속할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은총을 수단으로 이 종교를 초월하고 능가한다는 점이다. 종교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말한 종교의 철폐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말이 안된다. 이 말은 종교의 변형이나 승화로 번역해야 한다. 인간의 고안물로 여겨지고 하나님의 계시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종교는 분명 비판이 필요하지만 유용한 역할이 있다.

이러한 견해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디트리히 본회퍼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본회퍼가 현대 신학에 기여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할 현대 세계의 문화 상황을 분석한 일이다. 1943.4.5, 본회퍼는 아돌프 히틀러의 저항한 음모에 가담한 죄목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베를린의 테겔 형무소에서 18개월을 보내는 동안 그 유명한 <옥중 서간>을 섰다. 이 책에서 그는 성년에 이른 세상,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문제를 성찰하였다. 그는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열렬히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많은 오해를 받았다.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에서 그 오해를 볼 수 있다. 본회퍼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종교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기독교 형태였다. 본회퍼는 새로운 무신적 상황에서 볼 때 이런 가정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종교성 없는 기독교란, 인간이 천성적인 종교성이라는 사리에 맞지 않고 신뢰할 수 없는 개념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신앙을 말한다. 문화, 형이상학, 종교를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와 상당히 유사하다.)

본회퍼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현대 세계에 적합한 하나님 모델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 하나님은 세상에서 쫓겨나 십자자에게까지 밀려나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다. 본회퍼의 이러한 개념은 전후 독일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받았으면 1960년대 미국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도 혼동이 따랐다. 급진적 저술가들은 본회퍼의 종교성 없는 기독교, 바르트의 종교 철폐라는 말을 완전한 종말, 전통적 기독교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오해는 신에게 솔직히, 신죽음 운동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위일체론적 종교신학>

신학적으로 발전한 삼위일체론이 타종교의 신학에까지도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라이문도 파니카의 <삼위일체와 인간의 종교경험1973>에서 삼위일체의 틀이 인간의 영성 및 종교경험과 종교적 표현의 복잡한 본질을 헤아릴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였다. 1991년 니니안 스마트와 스티븐 콘스탄틴에 의해 더 발전하였다. 공저 <세계적 맥락에서 본 기독교 조직신학>에서 사회적 삼위일체 개념은 인간의 모든 종교경험의 바탕을 이루는 궁극적인 신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인간 영성의 여러 형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를 경험한 데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6년 자크 뒤피는 <종교 다원주의의 기독교 신학을 향하여>에서 이와 다른 제안을 하였다. 인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예수회 신학자 뒤피는 삼위일체 교리가 다른 종교 전통들이 증언하는 절대적 실재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서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뒤피의 성찰은 칼 라너가 제시한 사고체계를 더 깊이 발전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적 실재를 자기네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비록 익명으로 숨겨져 있긴 해도, 신적인 삼위일체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참된 종교 체험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기독교 계시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고 일하신다.'

2000년 가빈 드코스타는 <종교들의 만남과 삼위일체>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는 방법의 효율성을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기독교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라는 점을 신중하게 강조하면서도 성령의 보편적인 임재 안에서 다른 종교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이 타종교인과 교류하면서 하나님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성령의 보편적 임재와 사역으로 인해 타종교인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타종교 이른들이 지느는 의미는 바르트식의 종교 비판을 따르지 않고 삼위일체론적인 틀 안에서 타종교와 그들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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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종말론에 대해서

마지막 일들, 기독교의 희망


20세기에 널리 사용된 종말론이라는 용어는 '마지막 일들'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으며, 부활과 심판처럼 기독교인들이 장차 소망하는 일들을 다룬다.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앞에서 다루었던 다음 논의들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신학적 함의에 관한 논쟁

- 19세기 말에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종말론적 측면을 재발견하는 일

- 기독교 구원론의 종말론적 차원


종말론은 넓은 의미에서 '마지막에 관한 담론'을 뜻한다. 

마지막이란 개인의 죽음 또는 현시대의 종결을 가리킬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간을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종말론은 삶과 역사의 마지막과 관련된 믿음의 체계를 다룬다. 

근래에는(1980년대) 종말론적과 묵시적이라는 용어를 구분하였다. 

종말론은 죽은 자의 부활, 천국, 지옥 같은 마지막 일들과 관련된 기독교 신학의 분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묵시적이라는 말은 마지막 일들과 그러한 관심사에만 규정되지 않는 문학 장르나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묵시적이라는 말은(폭로, 드러냄, 계시) 예수가 태어나기 200년 전부터 태어난 후 200년까지 유대교 집단 내에서 등장한 특별한 문헌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유대적 묵시문헌은 하나님이 세상일에 곧 개입할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이 개입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고 원수들은 멸망하며, 세상의 현 질서는 뒤집혀 구속된 창조세계로 대체될 것이다. 

묵시문헌에는 환상과 꿈의 역할이 강조된다. 환상과 꿈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게 되는 통로였다. 묵시적이라는 문학양식, 저술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의 발전>

종말론에 대한 신학성경의 근거와 최근 신학에서 나타난 여러 해석을 살펴보자. 


1)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구성하는 중요한 자료이기에 신약성경의 중심 주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료는 예수의 설교와 바울의 저작들이다. 

예수의 설교에서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은 유대교 저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공관복음서(70번 사용) 나라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왕권, 통치의 대상이 되는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통치 행위 자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를 주로 사용)


예수의 설교에서 이 용어(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온 것이면서 그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진다. 주기도문에서 그 나라가 미래에 오게 된다고 말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포도주를 마시게 될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였다. 겨자씨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 지금과 아직 아니는 긴장상태를 이룬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시작되었고 미래에 완성된다는 점을 가리키는 말이 '시작된 종말론'이다. 


바울의 종말론 역시 지금과 아직 아니의 긴장에 대해 말한다. 

-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로운 때,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강조한다. 새 시대는(새로운 피조물)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실현된 종말론에서는 장차 올 시대의 모든 일들이 이미 현재에 완성되었다고 본다.(고린도전서) 이에 대해 바울은 세상의 궁극적인 변화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확신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새 시대'가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확증해 주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로 하여금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지식을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사건으로 보았다. 

- 바울은 마지막 말, 심판이 이루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을 기대하며, 신자들이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새로운 삶에 이르게 될 것을 확증한다. 바울은 주의 날, 마라타나,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강림과 최후의 심판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 바울 종말론의 중심 주제는 성령의 오심이다. 성경의 선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가 밝았음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성령의 성물을 아라본(보증, 맹세)로 해석하였다. 신자들이 현재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궁극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지금 여기서 그 미래 사건에(장차 완성될 구원) 대한 확신을 지니게 된다.


신약성경은 새 일은 미래에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지금과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이 긴장에 대한 문제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주제이며 계속 다룰 내용이다. 


2. 죽은 후의 재결합, 로마와 초기 기독교의 믿음

죽음 이후 가족의 재결합에 대한 고전적 장면(뱃사공 카론이 실어다주면 가족과 재결합, 스키피오의 꿈 등)이 기독교 저술의 형식과 소개에 영향을 주었다. 258년에 순교한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박해로 죽음에 직면했던 기독교인들에게 천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곳에서 순교자와 사도들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천국은 본향이며, 그곳을 떠나 살아온 삶이 이 땅 위의 인생이다. 본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결합한다는 소망은 큰 위로를 주었다. 


 이러한 주제는 395년에 사망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기리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의 추도문에도 발견된다. 천국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내 프라킬라와 딸 풀케리아를 껴안고 있으며 자기 아버지와 그의 전임자인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재결합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 두 도시

<하나님의 도성>은 대도시 로마가 파괴되고 로마제국이 멸망해 가던 묵시적 상황에서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의 도시와 세속 도시의 관계를 주심 주제로 다룬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시대에 산다. 교회는 세상 도시 안에서 나그네 상태로 살아간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세상 안에서 나그네로 신앙을 지켜가야 하는 교회의 현실과 이 세상에서 해방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미래의 희망 사이에는 강력한 종말론적 긴장이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에는 타락한 세사으이 모습이 섞여 있다. 순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성도와 죄인이 공존한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긴장은 해소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종말과 더불어 희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신자들은 구원받아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사실이 아니라 소망으로 주어진다. 구원은 신자들의 삶 속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역사의 마지막에 이러서야 완성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들의 삶의 악한 본성을 꿰뚫어보면서 그러한 현실이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복음의 명령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는지 염려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확고하고도 분명한 희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끝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하나는 존재했던 것이 존재하기르 ㄹ머추는 것이거나 또는 시작되었던 것이 완성됨을 뜻할 수 있다. 영원한 삶이란,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마침내 그 사랑의 대상과 연합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러 완성된다. 또한 완전에 이르게하는 상급이다. 


<피오레의 요아킴, 세 시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시대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가르는 시기가 된다. 이 구분에 대한 불만을 가진 해석자 중 하나인 피오레의 요아킴은 더 사변적인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좀 더 종말론적이고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요아킴은 코라소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면, 1177년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국 실라 산지에다 그 자신의 종교 단체를 세웠다. 

요아킴은 세계사를 세 시대로 구분한다. 

(1) 성부의 시대

구약성경의 시대이다. 결혼한 평신도 계급과 연관을 지으며, 율법 아래에서 살았다. 

(2) 성자의 시대

교회까지 포함한 신약성경 시대이다. 성직자 계급과 관련 짓는다.

(3) 성령의 시대

새로운 종교 운동들이 일어나 교회이 갱신과 개혁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이 세상에 평화와 일치가 성취된다. 수도사 계급과 연관짓는다. 

요아킴은 이 시대들의 정확한 날짜를 정하는 것이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42세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성직자의 시대는 1260년에 끝나게 되고 성령의 시대가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에서 현대에 나타난 천년왕국 운동의 많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이론은 당시 1260년이 가까워지면서 큰 소동을 일으켜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대해 교회가 염려하게 되었다.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는 그의 견해를 정죄했으며 아퀴나스는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요아킴이 말한 성령시대를 불과 5년 앞둔 1255년 교황청의 신학위원회는 그의 예언이 완전히 오류라고 견책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호감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제도적 특성을 강조한 교회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은 성령시대와 기존 교회를 대신할 영적인 교회의 도래를 기다렸다.  


(박영도목사님)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1) 요아킴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 중 하나는, 그를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고 본 시인 단테였다.(1265-1321) 단테는 기독교의 희망을 시로 표현하고 피렌체와 교회의 삶을 비판하기 위해 <신곡>을 썼다.  이 시는 1300년에 시작되며, 단테가 이교도인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는 일을 그리고 있다. 

2) 신곡은 중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 세계관은 죽은 자의 영혼은 깨끗하게 씻겨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후 하나님의 모습을 한순간 뵙게 된다. 종말론에서 신곡이 중요한 이유는 마지막 일들의 영적 지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신곡은 세 개의 주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지옥, 연옥, 천국이다. 

이 작품은 1300년 고난주간의 성금요일 해질 무렵에 시작된다. 지옥으로 하루 종일 내려갔다가 연옥을 향해 위로 올라간다. 더 위로 올라가 마침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 

4) 여행은 단테가 안내자와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다. 첫 안내자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다. 그는 고전과 인간 이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연옥 정점에 이르자 단테는 연인이었던 베아트리체(1290년 사망)와 함께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단테를 천국 바깥 환계들로 인도한다. 마지막으로 단테는 베르나르두스의 안내로 하나님 앞으로 간다. 

5) 이 시의 구조는 복잡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안내서로도 볼 수도 있다. 시인 자신이 자아 발견과 영적 여행을 떠나 내면의 열망을 발견하고 이루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6) 단테가 묘사하는 지오그이 지라가 흥미롭다. 지옥을 고대 기하학에서 완전형태라 여기는 여러 개의 동심원으로 그린다. 그것이 지옥의 아홉 환계이다. 

7) 단테는 지옥의 층들을 거쳐 가며 각 환계에 갇혀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림보는 지옥 전 단계로 고통도 없으며 이성의 빛에 해당하는 빛의 반구가 비추고 있다. 이 영역에 고결한 비기독교인들을 배치한다.(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등)

지옥의 두번째 환계는 '이성을 욕망의 노예로 내어준'사람들을 배치한다. 클레오파트라, 아킬레우스와 헬레네 등이다. 

8) 신곡은 중세 지옥관을 엿볼 수 있다. 성서를 보완해 줄 상당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단테는 종말론적 서술이 독자들의 마음을 끌고 세속과 교회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에다 활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 중세 세계관에 대한 증거자료로 깊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최금일목사님)

- 죽음 앞의 소망: 제레미 테일러

1) 사실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인의 삶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과 기독교 신자의 개인적인 영성의 관계를 연구한 17세기 신학자들을 살펴보자.

2) 제레미 테일러(1609-1667)는 17세기 가장 탁월한 영성 저술가이다. 찰스 시대의 신학자로 불리운다. 테일러는 17세기 영국 내전 중 왕당파를 지지하였으며 그후 청교도 공화정이 수립되자 배척당하게 된다. 그는 잠시 감금되었지만, 풀려난 후 보호관찰을 받으며 카베리의 백작인 리처드 본의 소속 사제로 일하였다. 

3) 그 기간에 테일러는 <거룩한 생활의 규칙과 수련1650>과 <거룩한 죽음의 규칙과 수련1651>을 집필하였다. 잘 죽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책의 목적은 기독교인들에게 편온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는 길을 안내한다. 

4)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수단으로 그는 죽음 너머의 일에 대한 소망을 관상하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성도들과 천사들이 누리는 지복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 세상보다 더 살기 좋은 곳, 더 고귀한 존재들, 더 좋은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며, 안식과 기쁨으로 가득한 곳에서 산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죽음은 놀라운 기쁨과 지복으로 인도해 주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영혼의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도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테일러의 확신에 찬 믿음에 따르면, 기독교의 희망을 관상하는 일은 삶의 위로와 용기를 준다. 


- 계몽주의: 종말론의 미신이다

1) 계몽주의 환경 속에서 종말론 교리는 근거가 없는 무지한 미신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지옥 개념은 특히 비판을 받았다. 공리주의적 사고는 영원한 형벌은 쓸모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2) 포이어바흐는 천국, 영생 개념은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불멸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투자한 것으로 보았다. 

3)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내세의 기쁨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현실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한을 주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종교는 현실 세계를 개혁하여 고난을 제거해야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의 종말론이 세속화된 형태이며, 혁명은 천국을 세속의 형태로 바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19세기 자유주의는 도덕적, 사회적 완전을 향한 인간의 점진적 발전을 강조하는 희망 교리를 선호하게 되면서 종말이라는 개념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5)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대중적인 진화론 형태로 퍼지면서 인간 역사도 고상하고 정교한 형태를 향해 발전하는 것으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종말론은 신학적 호기심거리로 추락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의 묵시적 함의를 박탈당한 채 도덕적 가치들의 정적인 영역으로 이해되었으며 사회는 계쇡 진화과정을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리츨)


(박준원 목사)

- 20세기 종말론의 재발견 

1) 계몽주의 접근법은 두 가지 발전으로 신뢰성이 무너졌다. 

첫째,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예수 설교의 묵시적 특성을 재발견하여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 관념으로 보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예수는 도덕 교사가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지식이 20세기 종말론을 재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 신약성서학자들이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찰스 다드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실현된 것,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책 <사도적 설교와 그 발전1936>에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마지막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고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3) 다드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나라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다! 예수의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4) 이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드가 자신의 견해를 너무 밀어붙였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리스어 원어는 하나님 나라가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드는 이러한 견해를 수용하여서 마지막 일들이 이미 발생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인정하였다. 

5) 20세기 종말론을 둘러싼 논의는 다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 미래적 종말론: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로, 파괴적인 모습으로 인류를 뚫고 들어올 것이다. (요하네스 바이스)

둘) 시작된 종말론: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전히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인간의 역사 속에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견해이다.)

셋) 실현된 종말론: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오심으로 이미 실현되었다. (찰스 다드)

6) 두번째 발전은 인간 문명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확신이 1차세계대전을 통해 완전히 무너졌다. 그렇다면 종말론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르부르크 대학의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제시한 이론이 5-60년대에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 루돌프 불트만: 종말론의 비신화화

1) 불트만의 비신화화라는 논쟁적인 프로그램은 역사의 종말에 관한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트만은 종말에 관한 믿음이 신화이며 실존론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신약성경은 알 수 없는 때와 장소(태초, 천국 등), 초자연적인 인물,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이런 이야기들의 근원적인 실존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적절한 해석과정을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가장 중요한 것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심판을 행하고 보상과 형벌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임박한 종말이라는 신화이다. 이러한 통찰이 중요한 이유는 이 통찰로 인해 그는 슈바이처가 철저한 종말론의 조건으로 입증한 것을 포괄적인 비신화화 과정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와 더불어 비슷한 신화들을 실존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종말론적 신화에서 역사가 실제로 종말을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신화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적으로 해석할 때, 신화는 인간 실존의 지금 여기와 연결되어 인간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실존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른바 심판이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기초로 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심판이라는 현재적 사건이다. 

4) 불트만은 초기 기독교가 종말론적 기대가 시들어 가던 1세기 말 요한복음에서 바로 이러한 비신화화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판을 인간이 하나님의 케리그마(말씀선포)와 마주칠 때 경험하는, 실존적 위기의 순간이라고 해석한다. 요한복음의 실현된 종말론이 복음서의 편집자가 파루시아(재림)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신자들과 케리그마와의 만남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이다. 

<특정한 순간에 선포되는 이 지금은 종말론적인 지금이다. 그 안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결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종말론적 신화를 인간 실존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라 언제나 현존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구체적인 선포로서 우리에게 실존적인 결단을 요청한다. 그는 종말론적인 과정은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사건이 되었으며 현재 기독교 선포 속에서 한 번 더 사건이 된다.

6) 이러한 이론은 비평가들이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하였고 불트만이 희망교리에서 핵심 내용을 너무 많이 포기했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종말론 개념은 순전히 개인주의적인데, 성경 속의 개념은 공동체적이다. 1960년대 후반 다른 이론이 등장한다. 훨씬 더 나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준원 목사)

-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1)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1926-)은 1964년 <희망을 신학>을 펴냈다. 

그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1938-1947)​>의 통찰을 따르고 있다. 블로흐는 인간의 문화는 현재의 모든 소외를 초월하는 미래에의 강렬한 희망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을 기초로, 인간의 경험을 신마르크스주의적으로 분석하였다. 블로흐는 자신이 혁명적이고 묵시적인 희망이라는 성서적 관념의 직계라고 생각하였다. 

2) 불트만이 비신화화를 통해 종말론을 납득할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블로흐는 원래의 성서적인 맥락에 실려 있는 격렬한 사회비판과 예언자적인 사회변혁 비전을 밝혀내서 종말론을 옹호하였다. 1960년대 유럽과 북미는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하였다. 희망이 가득해 보였다. 

3)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세속적 희망 비전을 배경으로 기독교 공동체적 희망 개념을 재발견하여 인간과 교회 사상에 핵심 동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몰트만은 종말론이 기독교 사상에서 핵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4) 몰트만의 미래지향적 태도는 '이해를 추구하는 희망(신앙)',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희망한다(믿는다)' 같은 구호로 요약된다. 안셀무스의 구호를 변형한 것이다. 몰트만은 신학이란 하나님의 변혁하는 사역을 통해 희망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5) (원문) 신앙은 그것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희망한다. 기독교 희망은 궁극적인 새 일을 지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킨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을 바로본다. 이렇게 해서 희망은 죽음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미래에의 전망을 연다. 

6) 몰트만은 희망이 개인적, 실존적,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희망은 전체 피조물의 공적인 희망이며, '희망의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갈망한다. 긴급한 과제는 이 종말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교회는 희망의 신학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만 세속 문화에게 귀를 열고 들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박영도 목사)

- 헬무트 틸리케: 윤리와 종말론

1) 현대 종말론의 중요한 논쟁은 독일 루터교회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1908-1986)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신학적 윤리(1958-1964)>에서 기독교 윤리의 신학적 근거를 탐구하였다. 윤리를 두 왕국 또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논하는 루터식 고전 윤리를 비판하였다. 

2) 틸리케는 세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기독교 윤리의 종말론적 특성을 강조한다. 현시대(에온)와 다가오는 시대의 긴장 관계 속에 신자와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기독교 윤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시대는 신자들에게 동시에 현존하며 기독교 윤리는 현시대의 실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 사이의 긴장을 인정해야만 한다. 미래적 현존은 기독교의 윤리적 사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3) (원문) 윤리는 옛 에온과 새 에온만 아니라 정확히 둘 사이의 긴장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형성된다. 윤리학의 문제는 마지막 때에 곧 승천과 최후의 날 사이의 기간에 두 에온이 동시적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윤리의 문제는 두 에온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까닭이다. 

4) 틸리케는 세속적인 표준에 근거한 윤리 이론은 기독교 시각에서 보면 결함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분석은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측면을 윤리학자와 신학자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최금일 목사)

- 세대주의: 종말론의 구조

1) 세대주의는 20세기 북미의 복음주의에서 20-70년 사이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운동이다. 구원의 역사를 여러 세대들로 이해한 데서 세대주의라는 이름이 생겼다. 영국의 존 넬슨 다비(1800-1882)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미국에서 스코필드(1843-1921)의 노력으로 발전하여 <스코필드 관주성경1909>은 세대주의 사상의 이정표가 되었다. 

2) 스코필드는 구원사를 일곱 개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각 시대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독특한 계약을 나타낸다. 

(1) 무죄시대: 창조에서 인류 타락 전까지

(2) 양심시대: 인류 타락에서 노아의 홍수 때까지

(3) 인간통치시대: 노아의 홍수에서 아브라함이 부름 받을 때까지

(4) 약속시대: 아브라함에서 모세 전까지

(5) 율법시대: 모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6) 교회시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현재까지

(7) 천년왕국시대

3) 세대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 방식이다. 

스콜필드와 찰스 라이리는 이스라엘을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였다. 결코 교회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각기 자체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닌 두 실체이다. 이스라엘은 땅 위의 나라에 희망을 둔 이 세상의 백성을 가리키며, 교회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곳에 목표를 둔 하늘의 백성을 가리킨다. 

4) 세대주의자들은 1948년에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스라엘 국가 설립에서 세대주의식 구약성경 이해가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최근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을 조금 더 완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 세대주의 핵심적 두 개념은 휴거와 환난이다. 

휴거는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에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그를 만나게 되는 일에 대한 신자들의 기대이다.(살전4:15-17) 

환난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예언적 환상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는 7년 기간을 말한다.(단9:24-27) 

6) 세대주의자들은 휴거를 환난 이전에 있을 일로 보아야 하는지, 환난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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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일 목사)

- 베네딕도16세: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1)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발표하였다.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라는 바울의 말에서 딴 제목) 기독교 희망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세속적 희망 개념과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 이 회칙은 신약성경의 희망 개념을 논한 후 마르크스주의에서 발견되는 것 같은 세속적 희망 비전을 다룬다.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내세에서 현세로, 하나님 나라에서 사회주의혁명ㅇ로 전해졌다. 그러나 세속적 희망 비전은 무기력해졌으며, 인간 본성이 여전히 변하지 않으므로 혼란에 빠졌다. 

3)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진보라는 것이 투석기에서 원자폭탄으로의 진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진보는 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 주지만, 악에 대한 끔찍한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4)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는 기독교의 희망 비전을 새롭게 제안한다. 새로운 개념보다는 전통적인 종말론적 주제들을 상황화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자. 

(1) 세속적 비전의 실패에 직면해서 다시 기독교의 희망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2) 인간의 고난 앞에서 희망의 중요성을 재차 확증하였다. 

5)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기독교의 희망을, 어둠 속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다시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실존의 모호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원리라고 말한다. 

6)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시어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에 의지하여 신뢰를 품고 살아가게 해주는, 믿을 만하고 안전한 틀을 기독교의 희망이 제공해 준다.  

7) 구속받은 삶은,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약속대로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루어진다. 어떠한 절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하고 참된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되 모든 일을 다 이루는 끝날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뿐이다. 

8) 이 회칙은 인간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다움에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고통에 맞서는 새롭고도 훨씬 더 깊은 능력을 인간에게 심어 주는 탁월한 이점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을 콘 솔라티오라는 말로 설명한다. 

9) (원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하나님은 고난당하실 수 없지만, 함께 고난을 겪으실 수 있다는 놀라운 말을 했다. 모든 고난 속에는,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위로(콘-솔리티오)가 있습니다. 

10) 이 회칙은 전통적 기독교 개념을 개몽주의 이후 새롭게 긍정한 것으라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이 회칙이 희망을 교회 영역을 넘어서까지 확장하지 못함 점을 지적하였다. 신음하는 피조물의 구원과 정의가 충만한 새 지구에 대한 희망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박준원 목사)

<마지막 일들>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 지옥

1) 지옥에 대한 관심은 중세 때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화가들은 화형, 고문 당하는 죄인을 지켜보는 의인) 에라스무스는 파리 신학자들이 지옥에 관한 글을 쓰는 데 열심을 내는 것을 보고, 분명 거기에 가봤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2)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을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사탄이 거주하는 아홉 개의 환계로 묘사한다. 단테는 지옥문 앞에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여, 희망을 내려놓아라!'는 명문을 달아 놓았다. 

지옥의 첫번째 환계에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기독교인들과 고결한 이교도들이 속한다. (림보)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내려갔던 곳이 이곳이라고 주장한다. 

두번째 환계는 음탕한 자들이 거하고 세번째는 탐욕스러운 자들, 네번째는 인색한 자들, 다섯번째는 화를 잘 내는 자들이 살고 있다. 이 환계들을 묶어 상부 지옥을 이룬다. 

상부와 하부 지옥에 사이에 스틱스 강이 가른다.(그리스로마신화) 여기에서부터 불을 보게 된다. 

여섯번째는 이교도들이 살며, 일곱번째는 강포한 자들이, 여덟번째는 사기꾼들(교황도 있다.), 아홉번째는 배신자들이 있다. 

3) 중세의 정적인 지옥관은 현대까지 중요하게 여겨졌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7월8일에 한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에 나타나 있다. 

(원문) 이 혹독하고도 두려운 고통은 결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주 오랫동안, 억겁의 세월을 이어가며 그 강력하고 무자비한 복수를 견디며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4) 이러한 지옥 개념은 점차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다음 비판을 눈여겨 보자. 

(1) 지옥의 존재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믿는 기독교 주장과 모순되어 보인다. 오리게네스의 만인의 회복이라는 교리에서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승리를 강조한다. 라이프니츠도 이것이 지옥 교리의 가장 큰 난제라고 보았다. 

(2) 보복적 정의 기념은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신약성경에 비추어 볼 때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19세기 저술가들이 죄인에게 계속해서 보복적이고 응보적인 형벌이 가해진다는 개념과 사랑의 하나님 개념이 조화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난점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에 어떤한 목적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5) 지옥 개념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렸다. 오늘날 복음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부정적 의미보다는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쪽에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조건적 불멸 이론이 등장한다. 

6) 1980년대 초부터 복음주의 내부에서 종말론의 쟁점들과 더불어 불멸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다루어졌다. 지옥 교리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여 조건적 불멸 이론을 주장하였다. 필립 에지컴 휴즈의 책 <참된 형상1989>에서 인간의 불멸에의 잠재성을 지느고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7) (원문) 불멸, 곧 불사는 육체적, 영적 피조물인 인간의 본질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까닭에 그 잠재성은 있었다. 이 잠재성은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고 실현되었다. 

8) 휴즈는 구원이란 불멸에의 잠재성이 현실화된 것이며, 이 현실화는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복음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불멸에 이를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활 수에 최후의 우주적 심판이 완료되면 두 왕국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역이요 다른 것은 악마의 영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휴즈는 단 하나의 왕국만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만물 속에 충만한데 이떻게 피조물 가운데서 이러한 충만함이 들지 않는 영역이나 부분이 있을 수 있는가? 

9) 이러한 조건적 불멸론의 흐름은 복음주의 내에서 저항에 부닺혔으며, 제임스 패커와 같은 신학자들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성경적으로 합당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로 공격하였다. 


<박영도 목사>

- 연옥

1)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견해 차이 가운데 하나가 연옥의 문제이다. 

연옥은 은총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천국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죄책을 깨끗하게 씻는 중간 단계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마카베오하 12:39-45에 보면,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자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 개념은 성경이 확고하게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2) 연옥 개념은 교부시대에 등장하였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는 똑같이, 참회할 기회도 누리자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다음 생애에서 '불로 정결케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초기 4세기 동안 동방교회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관습은 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예전이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죽은 자들이 처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다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무슨 효용이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다음 생애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현생의 죄에서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다.  

3)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관습은 4세기 무렵에 확고히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연옥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다듬는 일은 2세기가 지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저술에서 시작되었다. 마태복음12:32 주해에서(593-4) 그는 다가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한 죄들을 나중에 용서받게 되는 미래라는 측면에서 해석한다. 

4) 특별히 <정화하는 불>은 중세 때 연옥에 관한 글에 들어 있으며 이 말에서 연옥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원문)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어떤 죄들은 세상에서 용서 받을 수 있으며, 어떤 죄들은 다가오는 세상에서 용서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심판의 불과 대조되는 정화하는 불이라는 주제는 제노바의 카테리나가 1490년 무렵에 쓴 <연옥에 관한 논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었다. 

(원문)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죄책이 없기 때문에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들이 겪는 고통 외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혹독한 불이 필요하다. 이 불은 죄책을 제외하고는 지옥의 불과 같다. 

6)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연옥 개념을 거부했다. 두 가지 중요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1) 연옥 개념은 본질상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2) 연옥 개념은 신앙에 의한 칭의 교리와 모순된다. 

칭의교리는 개인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이를 수 있으며, 연옥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연옥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관삽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으며 개신교 예전에서 제외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연옥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관습을 계속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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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도 목사)

 

- 천년 왕국

1) 천년 왕국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떄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우주적 질서가 세워지는 때까지의 사이에 이 땅위에 회복되어 천년간 계속되는 왕국이다. 계시록20:2-5에 근거하는 이 개념은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이 관심을 사로잡았다. 

2) 2세기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는 이 땅 위의 천년왕국 개념을 여거 가지 고찰을 통해 확증하는데,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다시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라고 한 약속을 근거로 삼는다. 그는 만일 제자들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라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다. 

3) 이 개념을 명료하게 진술한 3세기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술에 서도 볼 수 있다. 

(원문) 

이 나라는 부활 후에 있게 되는 것으로 현재 상태와 다른 나라다.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도시로, 천국이 이 땅 위에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천년 동안 이어질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성도들은 그들의 공로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활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부활이 완료되면 불로 세상을 심판하고 파괴하는 일이 시작될 것이며, 우리는 천사 같은 실체로 홀연히 다 변화되어 하늘나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4)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천녀왕국은 의인들이 최종적으로 천국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들의 신앙으로 견뎌낸 고난에 대한 보상받는 기간이다. 

5) 3세기에 천년왕국 개념에 대한 반대가 점차 증가했다.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천년이라는 기간은 이 땅 위에 세워진 나라가 지속되는 시간을 문자적으로 예언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되고 장엄한 천상의 왕국을 묘사한 비유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부활이라는 주제가 곧바로 교부 사상가들에게 훨씬 더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6) 최근 천년왕국 개념이 개신교의 대중적인 신학과 설교에 인기를 끌게 되었다. 세 가지 주요 견해를 살펴보자!

(1) 무천년설

대부분의 학자들은 천년왕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견해가 400년 이후부터 1500년 간 주도해 왔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버렸다. 종교개혁에서도 종말론적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전혀 쓰지 않았다. 

점차 천년왕국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여러 이론들이 등장하였다. 이 견해를 무천년설로 부르게 되었는데, 전천년설과 후천년설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2) 전천년설

세대주의와 관계 있는 이 견해는 적그리스도라는 인물이 세상에 등장하게 될 것이며 환난이라 불리는 7년 동안의 고난 시기를 열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천년설은 초기 교회에서 400년까지 지배적인 견해였다. 이 이론의 종말은 지상에서 파괴와 전쟁과 재앙으로 이루어지는 그 엄청난 기간은 하나님께서 아마겟돈 전투에서 악을 물리침으로 끝나게 된다. 그 후 그리스도가 세상으로 돌아와서 천년 동안 다스리며 이 기간에 악의 세력이 완전히 정복된다. 여기서 환난 전 휴거에 대한 믿음을 동반한다. 기독교인들은 환난의 시기와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세상에서 끌어올림을 받는다. 기억해야할 사실은 전천년설은 하나님이 역사를 끝낼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계속해서 타락해 간다고 주장해서 매우 비관적인 세계관을 내세운다. 이 이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팀 라헤이와 제리 제킨스이 쓴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를 읽어보기 바란다. 

(3) 후천년설

이 견해는 19세기 개신교에서 유명해졌다. 천년왕국이 정의와 평화로 이루어지는 긴 기간이 끝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프린스턴 신학교 찰스 하지와 벤저민 워필드 같은 보수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인간이 악을 누르고 진보하여 결국에는 기독교화된 세상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교회가 전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모든 분야에서 진보를 이룬 평화와 번영의 황금시대를 세우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전천년설이 비관적인 전망을 지니지만, 후천년설은 낙관적이다. 이 주장은 두 차례의 세대계전의 피해와 고난으로 신뢰성이 손상되었으며, 전천년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최금일 목사)

- 천국

1) 천국 개념은 기본적으로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이 실현되고 악이 궁극적으로 소멸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잘 알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천국에서 죄는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되고 신앙 공동체와 하나님의 완전한 현존이 이루어진다. 

2) 신약성경의 천국 비유들은 공동체적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국은 혼인 잔치, 만찬, 도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생이란 인간 개인의 실존이 투사된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공동체와 함께 사랑이신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천국이라는 용어는 바울서신 속에 자주 등장한다. 바울에게 천국은 미래의 실재 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물질세계와 공존하는 영적 영역까지 포함된다. 천국은 신자들이 미래에 살집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을 위해 강림하실 때까지 현재 거하는 자리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4) 바울에게 천국은 신자들이 천국의 시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개념이다. 바울에게 천국은 지금과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천국을 미래에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또는 현재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단순한 개념은 인정되지 않는다. 

5) 그리스어권의 교회에서는 부활한 몸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성찰하였다. 마지막 날 신자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날 때, 그들은 어떤 몸을 지니게 될까? 천년왕국 개념에는 신자들이 몸으로 부활하여 이 세상 속에서 인간의 몸을 계속 지니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리게네스가 이 쟁점과 관련해 주요 사상가가 되면서, 초점이 부활로 옮아가게 되었다. 

6)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것으로 판단되는 두 가지 이론에 맞서 부활 교리를 옹호할 책임을 느꼈다. 먼저,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인간의 몸이 그 신체의 모든 부분과 기능과 함께 원래대로 되돌려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편에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이 모두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물적 요소를 포함한 부활 이해를 거부하였다. 

7) 오리게네스에게, 부활한 몸은 온전한 영적 실체가 분명했다. 부활한 몸은 이 세상의 삶에 어울리는 신체적 요소들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영적인 삶에 맞도록 바뀐다. 그의 생각에는 플라톤주의적 전제들 중 영혼불멸이론이 영향을 끼쳤다. 

(원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땅에 속하고 동물이었던 몸은 영적인 몸으로 대체될 것이며 그겋게 해서 천국에 거할 수 있게 된다. 

8) 오리게네스는 부활한 몸이 이 세상에서 지녔던 몸과 동일한 형상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부활은 개인의 정체성은 상실하지 않은 채 영적인 변형을 가져온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몸과 영혼의 철저한 분리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이원론은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 온 것이었다. 

9) 오리게네스를 비판한 사람들은 그의 플라톤주의적 사고는 부활한 몸에 대한 가르침의 다른 측면에서도 그 모습을 드려낸다. 6세기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오리게네스가 부활한 몸은 둥근 모양이라고 가르쳤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의 저술에서는 이와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10) 이러한 견해는 오리게네스를 혹독하게 비판하던 사람 가운데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의 저술 속에 변형된 형태로 발견된다. (가짜뉴스??) 

메토디우스는 오리게네스가 가르친 것은 진정 몸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다시 살아난 몸이 아니라 모호한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다. 철제 조각상을 녹여 다시 제작하는 일을 유비로 사용하여 몸의 부활의 물리적 실재를 강조하였다. 

11) (원문) 그것은 조각가가 금이나 재료를 녹여서, 모든 부분이 아름답게 조화된 고귀한 조각상을 제작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 조각상을 망가뜨렸다. 조각가는 다시 제작하기로 하였다.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이런 인간의 사례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본래의 재료로 해체하여 모든 흠을 제거해 없앤 후 다시 지으시는 것입니다. 조각상을 녹이는 것은 몸이 죽는 것이고 다시 주조하는 일은 죽음 이후의 부활에 해당합니다. 


(박준원 목사)

12) 오리게네스의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그는 부활한 몸의 영적 본질에 대한 바울의 말을 순전한 영적 몸이 아니라 성령에의 순종이라는 측면 에서 해석하였다. 

13) 부활한 몸은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까? 천국에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60세에 죽었다면, 천국에서 그는 60세의 모습으로 나타날까? 중세 때 이런 논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였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30세에 완전한 수준에 도달하기 때문에, 부활 때는 그 나이에 상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든 흠이 사라진, 30세쯤 사람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롬바르두스의 글)

14) 부활한 몸에 관한 기독교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물리적 이론과 영적 이론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고자 애썼지만, 사변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논쟁에는 천국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상대적인 등급이나 계급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다투었다. 5세기 테오도레투스는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에 천국에 든 사람들의 상대적인 지위와 특권은 그들이 살아생전에 이룬 업적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공로에 합당한 지위라는 교리는 암브로시우스의 저술에서도 중세신학에서도 나타난다. 

15)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이 교리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개신교가 공로 개념을 혐오했던 것이 이유이다. 히자만 등급의 복이라는 개념은 16-17세기 청교도 경건 서적에서 계속 퍼져 나갔다. 윌리엄 풀크는 천국에서 누리는 영광에는 등굽의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등급은 특별히 사랑받는 사람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정하신 만물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16) 천국 소망에서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이 책을 마무리 지으며 살펴보기에 딱 어울리는 주제가 지복직관이다. 기독교인은 마지막 때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보았던 하나님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찬란하고 신성한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뵙는 것이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과 중세 신학이 한결같이 다루어온 주제였다. 단테의 신곡은 마치매 하나님의 모습을 흘끗 뵙고는 그것을 태양과 여러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라고 노래하는 시편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영광스러운 뵘에 대한 소망은 삶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강력한 동기이다. 

17) 그로부터 3세기 후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이렇게 노래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뵈옵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뵈올 떄 비로소 살 것이요, 또 그분을 뵘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18) 이렇게 하나님을 뵙는 일을 기독교 신학이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부추겨 그 주제들에 관해 씨름하도록 격려할 수는 있다. 장차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이끄는 것도 신학이 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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